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해포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해포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해포에서 세상만사는 예로부터 뜻대로 안 되는 법 백발에는 전원에 가서 눕는 것이 제격이지. 산수에 묻혀 사는 그 넉넉함을 잘도 아니 조정에서 기억해 주지 않은들 뭐가 아쉬우랴. 베개 베고 누우면 해포의 파도소리 들려오고 발을 걷으면 오서산 산빛이 밀려든다. 동계거사가 이따금씩 찾아와서 술기운에 격한 말로 늘 나를 일으킨다. 蟹浦萬事從來意不如 (만사종래의불여) 白頭端合臥田廬 (백두단합와전려) 已諳丘壑生涯足 (이암구학생애족) 肯恨朝廷記憶疎 (긍한조정기억소) 蟹浦潮聲欹枕後 (해포조성의침후) 烏栖山色捲簾初 (오서산색권렴초) 東溪居士時相訪 (동계거사시상방) 得酒狂談每起予 (득주광담매기여)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1539 ~1609)가..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회를 쓰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회를 쓰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소회를 쓰다 30년 세월 공문서 만지며 관공서를 집으로 여기느라 태창에서 배급하는 묵은 쌀에 곤경도 많이 겪었네. 노쇠한 나이에 뿌리로 돌아가는 낙엽 신세여도 젊은 시절에는 똥구덕에 떨어지는 꽃잎이라 슬퍼했지. 떠나는 동료를 연민한 옛 사람의 글을 따분해했더니 가난을 즐기는 이웃 친구의 노래를 즐겨 듣게 됐네. 날씨 추워진 대지를 얼음이 뒤덮으려 할 때 자벌레는 깊이 숨어 흙구덩이에 엎드려 있네. 寫懷卅載簿書官作家(삽재부서관작가) 太倉紅粒困人多(태창홍립곤인다) 衰年自作歸根葉(쇠년자작귀근엽) 少日曾悲墮溷花(소일증비타혼화) 懶讀昔賢歎逝賦(나독석현탄서부) 耽聽隣友樂貧歌(탐청인우낙빈가) 天寒大地氷將結(천한대지빙장결) 尺蠖深藏伏土窠(척확심장복토과) ..

[가슴으로 읽는 한시] 어부가

[가슴으로 읽는 한시] 어부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어부가 지난밤 비바람이 사나워 닻줄을 강 언덕에 묶어 놓았네. 옆에 있었던 배가 근처에 있나 보다 갈대꽃 깊숙한 곳에서 어부가(漁父歌) 들려온다. 배를 저어 다가가서 말 좀 물어보자. "물고기가 참말로 많이 안 잡히네. 아침 되면 관가에서 신역(身役)을 독촉할 텐데 물고기를 잡지 못해 어쩐다나?" 漁謳夜來風雨惡(야래풍우악) 繫纜依江阿(계람의강아) 鄰舟不知遠(인주부지원) 蘆花深處起漁歌(노화심처기어가) 移舟相近爲相問(이주상근위상문) 爲言得魚苦無多(위언득어고무다) 朝來官府催身役(조래관부최신역) 得魚無多可奈何(득어무다가내하) 정조 때 문인이자 정치가인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1727~1810)이 열네 살 때 썼다. 인천에 살았기에 어촌의 풍물에 익숙..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상고대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상고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상고대 강가의 천 그루 만 그루 나무 하룻밤 새 모조리 백발노인 됐구나! 같은 기를 받아선지 다 함께 어울리고 거장의 솜씨라서 조각도 빼어나네. 솜처럼 하얗게 바람결에 흔들리고 한기에 시린 가지 햇살 받아 붉다. 물러나 늙을 몸이 세상에 보탬 될까? 깊숙이 틀어박혀 풍년이나 즐겨보자. 詠木氷江邊千萬樹(강변천만수) 一夜盡成翁(일야진성옹) 投合緣同氣(투합연동기) 雕鎪賴鉅工(조수뇌거공) 輕搖風絮白(경요풍서백) 寒透日華紅(한투일화홍) 退老身何補(퇴로신하보) 深居樂歲豐(심거락세풍)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 ~1836)이 마흔 살 무렵 늦겨울의 양수리 집에서 읊었다. 이른 아침 밖을 나와 보니 하룻밤 새 나무가 모두 백발노인이 되었다. 강가라서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낙지론 뒤에 쓴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낙지론 뒤에 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낙지론 뒤에 쓴다 가난한 선비가 살림살이는 옹색할망정 조물주에 다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기쁘다. 숲과 꽃을 힘들여서 재배할 일도 없고 못을 파고 폭포 만드는 공사는 벌리지도 않는다. 물고기랑 새랑 제풀에 와서 벗이 돼주고 시내와 산은 집을 에워싸고 창문을 보호한다. 그 속의 참 즐거움은 천 권의 책에 있나니 손길 가는 대로 뽑아 보면 온갖 잡념 사라진다. 題樂志論後 貧士生涯本隘窮(빈사생애본애궁) 卜居惟喜任天工(복거유희임천공) 林花不費栽培力(임화불비재배력) 潭瀑元無築鑿功(담폭원무축착공) 魚鳥自來爲伴侶(어조자래위반려) 溪山環擁護窓櫳(계산환옹호창롱) 箇中眞樂書千卷(개중진락서천권) 隨手抽看萬慮空(수수추간만려공)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갑산과 헤어지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갑산과 헤어지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갑산과 헤어지고 마음이 너무 슬퍼 맨 정신으로 도저히 못 헤어지고 술에 취해 헤어진 뒤 깨고 나선 슬픔만 더해지네. 성 위의 높다란 망루며 성안의 큰 나무여! 강을 건너면서 머리 돌려 작별도 못 했구나! 別夷山 心悲不敢醒時別(심비불감성시별) 醉別醒來只益悲(취별성래지익비) 城上高樓城裏樹(성상고루성리수) 未曾回首過江時(미증회수과강시) 초원(椒園) 이충익(李忠翊·1744~1816)이 1779년 봄에 현재의 북한 갑산군을 떠나며 지었다. 1755년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돼 그의 생부는 영남 기장으로, 양부는 갑산으로 유배됐다. 그때부터 그는 국토의 남북 양끝을 오가며 봉양의 세월을 무려 20년 넘게 보냈다. 1778년 11월 양부가 유배지에..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섬강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섬강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섬강에서 버드나무 저 너머 한참 동안 바라보니 안개 뚫고 손님 몇 분이 다가오누나. 작은 마을 적시며 봄비 오는데 노 젓는 부드러운 소리 푸른 물살 가르네. 함께 묵을 곳은 산사가 제격이고 호젓한 약속은 낚시터가 좋겠네. 내일 아침엘랑 꽃배를 끌고서 남포에서 꽃구경하고 돌아오리라. 蟾江 柳外多時望(유외다시망) 烟中數客來(연중수객래) 小州春雨濕(소주춘우습) 柔櫓碧波開(유로벽파개) 共宿應山寺(공숙응산사) 幽期且釣臺(유기갱조대) 明朝移畵艇(명조이화정) 南浦看花回(남포간화회)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1801)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살았다. 봄이 찾아온 섬강가 그의 집으로 손님이 찾아온다는 전갈이 도착했다. 대시인 신광수(申光洙) 일행이..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매화

[가슴으로 읽는 한시] 매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매화 창문 가득 스며드는 대나무 긴 그림자 밤 깊어 남쪽 사랑에 달이 떠올랐다. 이 몸 정녕 그 향기에 흠뻑 젖었는가? 바짝 다가서 코를 대도 조금도 모르겠구나. 梅 滿戶影交脩竹枝(만호영교수죽지) 夜分南閣月生時(야분남각월생시) 此身定與香全化(차신정여향전화) 嗅逼梅花寂不知(후핍매화적부지)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1720~1783)가 매화를 읊었다. 밤 깊어 달이 둥그렇게 떠올랐다. 창문에 대나무 가지 그림자가 뒤섞여 어른거리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사위(四圍)가 고요하여 낮 동안의 분잡함에서 벗어났다. 이제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한쪽 곁에 놓인 매화에 바짝 다가서 향기를 맡아본다. 향기가 전혀 느..

[가슴으로 읽는 한시] 비가 개었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비가 개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비가 개었다 비가 도착하자 구름이 다투어 나오더니 구름이 떠나가자 비가 벌써 개었다. 산은 지난밤 꿈에서 막 깨어나고 새들은 목청을 새로 바꾸나 보다. 조각조각 엷은 노을 멈춰 서고 파릇파릇 작은 풀싹 돋아난다. 송파 나루터의 저 나무들 어제저녁에는 선명히 뵈지도 않았다. 新晴 雨到雲爭出(우도운쟁출) 雲歸雨已晴(운귀우이청) 山如回昨夢(산여회작몽) 禽欲改新聲(금욕개신성) 片片輕霞住(편편경하주) 班班小草生(반반소초생) 松坡渡邊樹(송파도변수) 前夕未分明(전석미분명) 관양(冠陽) 이광덕(李匡德·1690~1748)이 1727년에 지었다. 어느 봄날 비가 내렸다. 비와 구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낯선 손님처럼 도착했다가 불쑥 떠나갔다. 손님이 들렀다 간..

[가슴으로 읽는 한시] 꽃지짐

[가슴으로 읽는 한시] 꽃지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꽃지짐 잔치가 열릴 때는 화롯불에 바짝 붙어도 좋아 기름 두른 솥 위에 쌀가루 뭉쳐서 지짐을 부쳤네. 꽃술을 포개어 하얀 꽃잎사귀 멋지게 만들고 동전을 흩뿌리듯 둥근 엽전보다 더 크게 펼쳐놨네. 기름기 떨어지는 것을 막 건져내 소쿠리 위에 얹어놓고 부드럽고 따끈할 때를 놓치지 않고 이로 물어 아삭아삭 씹어 먹었네. 꽃을 먹는다는 것이 멋도 없고 맛도 없다 말할지라도 꽃지짐이란 그 이름이 좋아 이 떡을 그렇게 먹었는가 보다. 花糕 當筵不厭近爐烟(당연불염근노연) 抟麵油铛耐可煎(단면유당내가전) 疊蘂渾成單葉白(첩예혼성단엽백) 攤錢稍大五銖圓(탄전초대오수원) 始撈流濕停簞上(시로유습정단상) 乘熱輕明響齒邊(승열경명향치변) 縱道啖花無色味(종도담화무색미) 此糕只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