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난자의 한줄로 고전 91

떨어지는 단풍이여

겉도 보이고 / 속도 보이며 / 떨어지는 단풍이여 일본의 와카(和歌) 시인이며 조동종 승려였던 료칸(大愚良寬·1758∼1831) 선사의 사세구(辭世句)다. 길을 나서니 플라타너스 잎사귀 한 장이 발등에 떨어진다. 내 손바닥보다 큰 잎의 무게가 인기척처럼 느껴진다. ‘가을이네요’ 어깨를 스치는 눈인사 같다. 장중한 낙하(落下). 어김없이 내 입에서는 이 시구가 맴돈다. “겉도 보이고/ 속도 보이며/ 떨어지는 단풍이여.” 료칸 선사는 국상(國上)산에 오합암(五合庵)을 지어놓고 청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이 칠십 무렵, 그는 정심니라는 젊은 비구니의 방문을 받는다. 그녀는 무사(武士)의 딸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의사에게 출가했으나 살림보다는 문학을 더 좋아했다. 이혼 후 불교에 입문한 그녀는 료칸 선사에..

고향

총국양개타일루(叢菊兩開他日淚)하고 고주일계고원심(孤舟一繫故園心)이라 국화는 다시 피어 눈물짓게 하고/ 외로운 배는 매인 채라 언제 고향에 돌아가랴. 두보(712∼770)의 ‘추흥(秋興)’ 8수 중 1수의 안구(眼句)다. 전란으로 고향을 떠난 두보는 가족을 배에 태우고 장강을 떠돌다가 기주(夔州)에서 2년간 머물렀다. 전 생애 시작품 중 삼 분의 일(440수)을 여기서 지었다. ‘찬 이슬 내려 단풍은 물드는데/ 쓸쓸한 무산(巫山) 골짜기를 가면/ 강 물결 하늘에 치솟고/ 변방을 어둡게 뒤덮는 구름/ 국화는 다시 피어 눈물짓게 하고/ 외로운 배는 매인 채라 언제 고향에 돌아가랴/ 이제 추위가 오리라/ 백제성을 흔드는 다듬이소리, 다듬이소리.’(1수의 전문) 이 시의 ‘고주일계’ 외롭게 매여 있는 배 한 척...

적연부동(寂然不動)

역(易)은 무사야(無思也)하며, 무위야(無爲也)하여 적연부동(寂然不動)하다가 감이수통천하지고(感而遂通天下之故)하나니 비천하지지신(非天下之至神)이면 기숙능여어차(其孰能與於此)리오. 공자의 ‘계사전’ 제10장의 말씀이다. “역은 아무런 생각도 행위도 없으며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느껴서 천하의 현상을 모두 통달하나니, 천하의 지극한 신묘함이 아니고서 누가 이럴 수 있겠는가?” ‘무사(無思) 무위(無爲)’로 역(易)에 통달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사 무위’는 생각이나 행동에 어떤 하고자 하는 의도나 욕심이 전혀 없는 허령(虛靈)한 마음 상태다. ‘무사’는 미발(未發)이고 ‘무위’는 정(靜)이다. 행동이 밖으로 나가기 전 ‘미발’의 지극한 고요함 속에 움직이지 않다가 일단 감응이 생기면 교..

구름과 비, 이슬과 서리

운등(雲騰)하야 치우(致雨)하고 노결(露結)하야 위상(爲霜)하니라. 구름이 올라 비가 되고, 이슬이 엉겨 서리가 된다. ‘천자문’의 아홉 번째 글귀다. 구름과 비 사이의 인과관계, 이슬과 서리의 차제(次第). 눈여겨보면 그 속에 천도의 역리(易理)가 숨어 있다. ‘천자문’에서 다섯 번째의 ‘한래서왕(寒來暑往)’에 이어 ‘추수동장(秋收冬藏) 윤여성세(閏餘成歲) 율려조양(律呂調陽)’, 그다음이 ‘운등치우’다. 오래전 서울 홍제동 화장터에서 피어나는 구름과 마주한 적이 있다. 동생을 잃고 바라보던 솜뭉치 같던 구름. 구름은 비가 돼 지상에 내려와 얼음이 되고, 얼음은 녹아 다시 수증기로 증발해 구름이 된다. 우리의 생사를 물과 얼음에 비유한 한산(寒山) 스님의 시구는 얼마나 또 나의 가슴을 뛰게 했던가. 이는..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 ‘천자문’의 첫 여덟 글자다. ‘천자문’을 지은 중국 양(梁)나라 문인 주흥사(周興嗣)는 무슨 일로 황제의 노여움을 사 사형을 앞두게 됐는데 그의 재주를 아까워한 황제가 “하룻밤 안에 1000자로 사언절구를 지으면 죄를 사해주겠다”고 하니 그가 하룻밤 사이에 4자 1구로 250구를 이뤄내니 날이 밝았고 그의 머리칼은 하얗게 세어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한다. ‘천지현황’은 ‘주역’ 곤(坤)괘에 연원을 둔다. 역의 이치는 ‘음변(陰變) 양화(陽化)’로 음이 다 자라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극성(極盛)하면 음으로 화한다. 곤(坤)괘, 상6에 “용전우야(龍戰于野)하니 기혈(其血)이 현황(玄黃)이라”, 즉 용이 들판에..

제천단(祭天壇)과 단군왕검

제천단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穴口)의 바다와 마니산에 성을 쌓고 단을 만들어 제천단(祭天壇)이라 이름했다. (…)하늘은 음을 좋아하고 땅은 양을 귀히 여기므로 제단은 반드시 수중산(水中山)에 만드는 것이요, 위가 네모나고 아래가 둥근 것은 하늘과 땅의 뜻을 세운 것이다. ‘동사(東史)’에 적힌 제천단의 설명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제천단. 오래전 제천단을 보려고 마니산에 올랐다. 초소 옆에 헬기 이륙장이 있었고 그 앞에 개천절 행사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일곱 선녀가 깃털 부채를 들고 춤추는 사진에서 제단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분명 네모꼴의 방형(方形)이었다. 동행한 사진작가의 줌카메라로 들여다보니 제천단이 확 다가왔다. 둥글게 쌓은 아랫단과 네모 반듯..

걷기와 침묵

“걷기와 침묵은 나를 구원해 주었다. 걷기와 침묵은 속도를 늦추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주었다. (…) 침묵은 총체적이면서 독립적인 현상으로, 외적인 요소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나는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재발견한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존 프랜시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에서 한 말이다. 표지에 ‘22년간의 도보여행, 17년간의 침묵여행’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1971년 1월, 샌프란시스코와 마린반도를 잇는 금문교 밑에서 유조선 2척이 충돌했다. 안개가 걷히자 시커먼 타르와 함께 죽어가는 새와 물고기, 바다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에서 노인은 죄인의 심정이 된다. 어릴 때 본 자동차 바퀴에 깔린 개똥지빠귀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 ..

적멸위락(寂滅爲樂)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다. 이것은 났다(生)가 사라지는(滅) 법이다. 태어나고 죽는 생멸(生滅)이 없어진 자리에, 적멸(寂滅)은 그대로 즐거움이다. ‘열반경’ 4구게다. 어떻게 해야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사고(生死苦)를 고뇌하던 싯다르타는 ‘생멸(生滅)이 적멸(寂滅)’임을 깨닫고 적멸락(寂滅樂)을 얻어 붓다가 됐다. 적멸락은 생사의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바 열반 적정(寂靜)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생사의 고통을 어떻게 여의는가? 그건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죽음이 없다기보다 내가 죽는 일은 아예 없다는 것이다. 죽을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아는 일이다. 왜 내가 ..

이방인

어찌 보면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참여시키지도 않고 모든 게 진행됐다.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내 운명이 결정되는 식이었다.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소설 ‘이방인’의 한 대목이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뫼르소가 우발적으로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이고 법정에서 냉혈한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살인 동기는 햇빛 때문이었다고만 말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펼쳐지던 운명, 무의미한 출근부 날인, 따분한 일상.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왜? 라는 질문이 떠오르고 삶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어느 여름날 오후, 눈앞의 세상이 온통 백색으로 펼쳐지던 그때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사내의 몸뚱이에 다시 네 발을 쏘았다. 아무런 까..

‘대학’의 도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고 재친(신)민(在親(新)民)하며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니라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선에 머무름에 있다. ‘대학(大學)’의 서두다. 대학은 중용·논어·맹자와 더불어 ‘4서’라 일컬어지는 유교 경전이다. 그 내용은 정치의 최종 목적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두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먼저 수신제가(修身齊家)해야 한다. 몸을 닦는 데는 마음을 바르게 먹고 뜻을 성실하게 지녀야 한다는 ‘정심성의(正心誠意)’를, 이를 위해서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 지식을 수득(修得)해야 한다는 것을 정연한 논리로 펼치고 있다. 대학의 핵심은 3강령으로 위에서 밝힌 ‘명명덕’ ‘친(신)민’ ‘지어지선’이다. 어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