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난자의 한줄로 고전 91

평등사상

어찌 큰놈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놈만 죽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고려 때 문장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중 ‘슬견설’(蝨犬說)의 한 대목이다. 제목 그대로 이(蝨)와 개(犬)의 죽음을 놓고 생명에는 차등이 없다는 평등사상을 일깨운다. 아주 오래전 휴가 나온 시동생의 군복을 세탁할 때였다. 옷에 이가 많았다. 벌건 연탄 화덕을 꺼내 놓고 그 위에서 옷을 털었다. 타닥타닥 탁! 통쾌했다. 그 후 내가 읽은 ‘슬견설’에서 이규보는 어느 젊은이가 큰 몽둥이로 개를 때려죽이는 것을 보고 경악하자 하필 이글거리는 화로를 끼고 앉아 이를 잡아 태워죽이는 것에 비교하며 생명에는 차등이 없음을 설파했다. “무릇 피와 기운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말·돼지·양·벌레·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페스트

전염병이 예상외로 빨리 퍼지지요?” 랑베르(기자)가 묻는다. … “자재가 부족합니다.” 리외(의사)가 말한다. … “외부에서 의사들과 보건대원들이 왔는데도요?” “그렇습니다. 의사 10명을 포함, 100여 명이 왔어요. 보기에는 많습니다. 그런데 그 인원으로 현재 병세를 감당하기엔 빠듯해요. 병이 더 퍼지면 그 인원으론 불충분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제2부에 나오는 내용이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만연하자 오랑시는 외부와 차단된다. 모든 것이 봉쇄된 한계상황에서 역병은 더 기승을 부리고 시내는 큰 혼란에 빠진다. 그 틈에 돈을 벌려는 무리도 날뛴다. 신부 파늘루는 페스트를 신의 형벌로 생각하고 치료를 거부하며 기도에 전념하자고 외치지만 결국 페스트에 감염돼 사망한다. 죄를 짓고 경..

루소의 횃불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땐 모든 것이 좋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으면 모든 것이 나빠진다.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교육론을 담은 소설 ‘에밀’의 첫 구절이다. 편견과 권위의 시선은 우리 본연의 자연성을 질식시킨다. 이럴 때 교육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가. 루소는 ‘에밀’이라는 고아를 상정해 그 부모 역할을 맡아 참된 교사와 제자의 운명이 평생 하나가 되기를 염원하며 에밀에게 최선을 다한다. 마치 내다 버린 자기 아들을 향한 것처럼 간절한 그의 소망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죄송하게 했다. 나는 하숙집 어린 식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다섯을 모두 고아원에 맡긴 그의 처사를 몹시 비난한 적이 있었다.(루소는 태어난 지 9일 만에 어머니를 잃고 10살 때 아버지가 가출했다.) ‘이 숙명적 행위가 ..

3·1 정신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으셔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 동학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가 쓴 ‘용담유사’의 교훈가 중 한 토막이다. 한울님이 네 몸에 계시니 먼 데서 찾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경주 용담정에서 수련 정진 중 웬 신선의 말이 들려 깜짝 놀라 캐물은즉 대답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이 선약(仙藥)이요, 그 모양은 태극(太極)이요, 또 그 모양은 궁궁(弓弓)이니 내 영부를 받아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고 내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를 위해 하면 너 또한 장생(長生)해 덕을 천하에 펴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종교체험은 그의 ‘동경대전’에 적혀 있다. 수운이 그때 받은 주문은..

쓸모없음의 쓸모있음

쓸모없음의 쓸모있음 且予求無所可用久矣(차여구무소가용구의) 幾死(기사) 乃今得之(내금득지) 爲予大用(위여대용) 使予也而有用(사여야이유용) 且得有此大也邪(차득유차대야사) 또한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 지가 오래됐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겨 이제야 내 쓸모없음을 큰 쓸모로 삼게 됐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토록 커질 수 있었겠는가? 장자’는 인간세편에서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중요성을 이같이 강조한다. 어느 날 대목장 석이 제자를 데리고 제나라로 가다가 토지신을 모신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굵기는 백 아름이나 되고,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인데 그가 거들떠보지도 않자 제자가 물었다. “저는 도끼를 잡은 이래로 이토록 아름다운 나무는 처음 보는데 선생님은 왜 그냥 지나치십니까?” 석이 답한다. “그건..

試鍊

天將降大任於是人也 천장강대임어시인야 必先苦其心志 필선고기심지 勞其筋骨 노기근골 餓其體膚 아기체부 空乏其身 공핍기신 行拂亂其所爲 행불난기소위 하늘이 장차 대임을 내리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심지를 괴롭히고 그 근골을 수고케 하고 그 체부를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무슨 일을 하건 매사에 실패를 보게끔 하여 試鍊한다 孟子 告子下 편의 말씀이다.

生而不有

만물(萬物)은 작언이불사(作焉而不辭)하며 生而不有하며 爲而不恃하며 功成而不居라 만물은 이에 지어도 사양하지 않으며 생겨도 소유하지 않으며, 하되 기대지 않으며, 성공해도 거(居)하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 제2장의 말씀이다. 만물이 제멋대로 생성될지라도 자연은 싫다거나 귀찮아하지(不辭) 않고, 그것이 자라나도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잘 자라게 하고도 그것에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공(功)을 이룰지라도 그 공로에 머물지 않는다. 생(生)하되 생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생이불유’, 일을 성취하고도 나의 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위이불시’를 본받고 싶었다. 노자는 이 부분을 제51장에서 또다시 언급한다. “생이불위(生而不爲)하며 위이불시(爲而不恃)하며 장이부재(長而不宰)하나니 시위현덕(是..

正見

弓影疑爲蛇蝎(궁영의위사갈) 寢石視爲伏虎(침석시위복호) 활 그림자를 보고도 뱀이나 전갈로 알고, 바위를 보고도 엎드린 범인가 두려워한다.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경우처럼 사물을 바로 보지(正見·정견) 못하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어두운 밤길, 나는 버려진 새끼줄을 보고 뱀인 줄 알고 흠칫 놀란 적이 있다. 다가가 실체를 확인하곤 다짐한 것이 있다. 엎드린 바위가 진짜 호랑이일지라도 미리 겁먹지 말고 실체를 확인한 다음 놀라자고. 일단 의심하는 마음이 들면 그 의심은 암귀(暗鬼)를 낳는다. 진(晉)나라 사람 두선은 악광(樂廣)을 만나 술잔을 받았는데 그 속에 뱀이 떠 있는 것을 봤다. 상사 앞이라 사양하지 못하고 단숨에 마셔버렸는데 그 후 백약이 무효인 병에 ..

용서

용서 “죽어가는 나치 청년이 내게 용서를 구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그의 침대 곁에 앉아 끝까지 침묵을 지킨 것은 옳은 일이었을까, 아니면 틀린 일이었을까?” ‘나치 헌터’로 알려진 사이먼 비젠탈(1908∼2005)이 자신의 에세이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에서 이렇게 반문한다. 그는 나치 수용소에 4년 가까이 갇혀 있었다. 89명의 친척을 잃고 아내와 겨우 살아남았다. 전쟁 이후 미국 전쟁범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평생의 추적 끝에 1100명의 나치 범죄자를 심판대에 세웠다. 그는 어느 날, 간호사의 부름을 받고 임종실에서 온몸을 붕대로 감싼 친위대 대원을 만난다. 죽음 직전의 청년은 노인과 여자와 어린아이 등 200명쯤 되는 유대인을 건물에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고 고백했다. 작가는 죽어가는 청년을 ..

좁은 문

좁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서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고 이로부터 가는 자가 많다.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해 이를 찾아내는 자 적더라. ‘마태복음’ 제7장에 나오는 말이다.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은데 왜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가는 자가 적을까? 그만큼 가치 있고 귀하기 때문이리라. 가치 있는 일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른다. 앙드레 지드(1869∼1951)의 ‘좁은 문’에서 나는 그 같은 사랑의 가치를 발견한다. 소설 속 화자 제롬이 휴가를 맞아 알리사네 집에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은 첫눈에 이끌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알리사의 동생 줄리엣 역시 제롬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는 희생적인 언니에게서 행복을 앗아오지 않으려고 작정하고 나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