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난자의 한줄로 고전 91

언행은 군자의 추기(樞機)

언행(言行)은 군자지추기(君子之樞機)이니 추기지발(樞機之發)이 영욕지주야(榮辱之主也)라. 언행(言行)은 군자지소이동천지야(君子之所以動天地也)니 가불신호(可不愼乎)라. ‘주역’의 ‘계사전’ 제8장에서 공자는 ‘언행’의 중요성을 이같이 강조한다. “언행은 군자의 추기(중추가 되는 것)니 이의 발함이 영욕의 주가 되느니라. 군자의 언행은 천지를 움직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군자가 집에서 한마디 하더라도 그 말이 선하면 천 리 밖에서도 호응하는데 하물며 가까운 데서랴! 이 말씀을 붙들고 산 미수 허목(1595∼1682) 선생은 저서 ‘미수기언’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언행은 군자의 추기로서(…) 천지를 움직이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계사전’ 말씀으로 날마다 반성하..

파리를 조문하다

파리야, 날아와서 음식상에 모여라. 수북이 담은 쌀밥에 국도 간 맞춰 끓여놓았고, 술도 잘 익어 향기롭고 국수와 만두도 곁들였으니 어서 와서 너희들의 마른 목구멍을 적시고 너희들의 주린 창자를 채우라. 다산 정약용 시문집에 적힌 ‘파리를 조문하는 글’ 조승문(弔蠅文)의 한 대목이다. 유배지인 강진에서 굶어 죽는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한 다산 선생은 지방관리들의 가렴주구를 더는 그냥 볼 수 없었다. 경오년 여름에 쉬파리가 말할 수 없이 들끓었다.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 났다고 약을 놓아 파리를 때려잡을 궁리를 했지만, 선생은 이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아. 이것은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분명 굶주려 죽은 백성들이 다시 태어난 몸이기 때문”이라며 위와 같은 글을 지어 파리..

비곗덩어리

불 드 쉬프는 허둥지둥 일어나 왔기 때문에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했다. (…) 아무도 그녀 쪽을 보려고도, 생각해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 처음에는 그녀를 희생양으로 제공하고 그러고 나서 쓸모없는 더러운 물건처럼 내던져버린 놈들. 그녀는 이 자들이 떼거리처럼 처먹어버린 맛있는 음식이 가득 담겨 있던 자기 바구니를 생각했다. 모파상(1850∼1893)의 단편 ‘비곗덩어리’의 결미 부분이다. 이 가엾은 여인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권력자의 성추행을 언급한 서지문 교수의 글(2020.7.21 문화일보)을 읽으면서였다. “… 박 전 시장을 변호하고 동정하는 모든 여성에게 묻는다. 그의 ‘절절한’ 텔레그램 메시지나 피해자 무릎의 멍에 대한 ‘연민’이 그 여성을 애절하게 연모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나왔을까. 박 ..

홍사용의 눈물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요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생략) 노작(露雀) 홍사용(1900∼1947) 시인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시 전문(前文)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가 살아계시기만 하면..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라

여독애련지(予獨愛蓮之) 출어어니이불염(出於어泥而不染)하고 탁청련이불요(濯淸漣而不妖)하며 중통외직(中通外直)하고 불만부지(不蔓不枝)하며 향원익청(香遠益淸)하고 정정정식(亭亭淨植)하니 가원관이불가설완언(可遠觀而不可褻翫焉)이라. 송대 유학자 주돈이(1017∼1073) 선생의 ‘애련설(愛蓮說)’의 일부다. 나 홀로 연(蓮)을 사랑하노니, 진흙에서 나와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어 요염하지 않으며, 그 대는 속이 비어서 구멍이 통해 있고 밖은 곧다.中通外直이다. 덩굴지지 않고 가지도 없으며 꽃의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물 가운데 우뚝 서 있으니 멀리(연당 언저리에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가서 매만지며 설완(褻翫)할 수는 없노라”고 찬탄했다. 6가지 미덕 중에 진흙탕 속에 발을 담그고도 거기에 물들..

나는 누구인가

부처가 무엇입니까? 佛行是佛 혜능 스님은 어느 제자의 물음에 “부처의 행위가 부처다”라고 했다.(‘육조단경’) 행위가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악인(惡人)과 선인(善人)은 처음부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행위가 악인을 만들고, 선한 행위가 선인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혜능 스님의 말씀에 대입해본다. ‘아행시아(我行是我).’ 내가 행한 것이 곧 나라고 하겠다. 내 행위가 나를 규정짓는다. 그것은 온전히 내 의지에 달려 있다. 존엄한 자유의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만난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 떠오른다. 당시 조용히 품었던 나의 표상. 소년 어니스트도 석양에 빛나는 산골짜기의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언젠가 나타나리라는 ‘큰 바위 얼굴’을 한 거룩한 사람이 찾아오기..

무(無)는 유(有)의 근원

反者는 道之動이요, 弱者는 道之用이다 天下萬物은 生於有하고 有生於無니라 반복하는 것은 도의 운동이요, 약함은 도의 활동이다. 천하의 만물은 유(有)에 의거해 생기고, 유는 무(無)에 의거해 생긴다. 노자 ‘도덕경’ 제40장의 말씀이다. 道란 우주 만물이 가야 하는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사물의 시작을 거슬러 끝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을 말한다. 물극필반(物極必反)과 원시반종(原始反終)인 도의 움직임으로 만물은 본원으로 회귀한다. 천변만화하는 세상의 물건은 만물의 어머니인 유에서 나왔고, 이 유는 천지의 비롯함인 무에서 나왔으므로 결국은 도의 근원인 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노자의 ‘유생어무(有生於無)’를 뒷받침하는 미국의 우주론학자 로런스 크라우스의 책 ‘무로부터의 우주’(2013)는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환지본처

부좌이좌(敷座而坐) 하시다 자리를 펴고 앉으시다 금강경’ 32품 중 제1품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서두의 글이다. “이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대비구 1250명과 함께 계셨다. 밥때가 되자 세존께서는 가사를 수하고 바리때를 들고 사위성으로 들어가 성안에서 밥을 빌 적에 차례로 일곱 집을 마치고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밥을 들고, 가사와 바리때를 거두고 발을 씻고는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여기엔 일상을 뛰어넘는 비범한 가르침이 있는데 이를 짐작이나마 하게 된 것은 그 평범한 일상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면서였다. 아이들을 제쳐 두고 직장으로 뛰어야 했던 젊은 시절, 무덥고 나른한 오후였다. 몸에 열도 느껴지고 발걸음은 무거운데 양손에는 저녁 찬거리가 들려 있었다. 눈앞 ..

어떻게 죽을 것인가

바로 이것이 내가 바라던 것이다. 이것은 선(善)을 위한 전부이고,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1828∼1910)가 숨지기 전, 아스타포보의 간이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여든세 살이 되던 해, 그는 죽기 열흘 전 “내가 생활해 온 사치한 환경 속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늙은이들이 잘하는 식으로 떠나가려오.” 이런 글귀를 아내에게 남기고 작업복 차림에 망토를 걸치고 10월 28일 새벽 집을 나섰다. 샤마르디노 수도원으로 가서 여동생을 만나고, 우랄산맥을 넘어가는 3등 객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도 없는 여행길이었다. 추운 객차 안에서 갑자기 그의 몸은 불덩이가 됐다. 기차가 멈춘 곳은 아스타포보의 작은 역사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인간의 잠재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낙원을 상실해야 한다.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년)의 한 대목이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해 인간의 물질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생활도 완전히 통제·규격화돼 운영되는 미래의 영국사회를 펼쳐 보인다. 정부가 인간배아 배양소를 운영하면서 발달단계에 있는 배아는 잘 자라게 관리하고 그러지 못한 배아는 의도적으로 잔인한 화학처리를 한다. 모든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격한 교육과 최면을 통해 길들이고 계급에 따라 차별대우를 한다. 이 같은 사회제도는 안전망 역할을 하지만 인간성과 자유의지를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생명공학기술에 의해 인류를 맞춤형으로 대량 생산하거나 인구를 통제하는 일도 가능하게 된다. 심지어 ‘소마’라는 환각제 한 알로 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