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난자의 한줄로 고전 91

내가 처한 상황이 나라는 존재를 보여준다

인간은 현상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때문에 불안해진다. 2세기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의 ‘담화록(Discourse)’에 들어 있는 글귀다. 그는 터키 영토인 히에라폴리스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첫 번째 주인에게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평생 다리를 절었는데, 두 번째 주인인 에파프로디투스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고 스토아 철학자인 무소니우스 루푸스 밑에서 공부하도록 도왔다. ‘철학이란 정신과 육체의 훈련’이라고 강조한 철학자는 그의 스승 루푸스였고, 신경과학자들은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인간 두뇌의 놀라운 능력을 ‘가소성’이라고 불렀는데 이 가소성을 처음으로 주목한 사람이 바로 에픽테토스였다. 그는 ‘담화록’에서 “인간의 정신보다 더 다루기 쉬운 것은 없다..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

千世之後 其必 有人與人 相食者也 천 년 뒤에는 틀림없이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날이 올 것이다 장자(莊子)는 ‘경상초(庚桑楚)’ 편에서 말한다. “만일 현자를 등용한다면 백성은 저마다 등용되려고 서로 다투게 되고, 지혜 있는 자에게 벼슬을 맡기면 백성은 모두 간악해져 서로 속이게 된다. 백성은 자기 이익만을 위하게 되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며 대낮에 강도질·도둑질을 하게 된다. 밝혀두건대 천 년 뒤에는 틀림없이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날이 올 것이다.” 스펙 좋은 사람을 우대하면 스펙 때문에 (위조하려는) 폐단이 생기고, 지식은 점차 교활한 도구로 전락해 고등수법 범죄가 우리의 예측을 불허하게 한다. 장자의 이런 예언을 일찍이 주목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작가 루쉰(魯迅)이다. ..

羞惡之心

羞惡之心 義之端也 자신의 불선(不善)을 부끄럽게 느끼고, 남의 악(惡)을 미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시작이다. 맹자(孟子)의 사단설(四端說) 중 하나이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는 맹자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있어서 차마 남에게 잔인하게 굴지 못하며,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네 가지 덕성을 지닌다고 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봤을 때 무조건 달려가 구하는 마음이 측은지심인데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端緖)요,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서, 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서, 시비지심은..

舜은 누구인가

舜何人也 予何人也 순(舜)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맹자’에서 만난 이 글귀는 대장부다운 그의 포부를 짐작하게 한다. “성인 순도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겠는가? 순이 할 수 있었던 것을 나라고 할 수 없겠는가?” 그의 뜻은 오로지 성인에 있었다. 순은 효성이 지극하고 어질었으므로 요(堯)임금에게 기용돼 섭정을 하다가 요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요임금과 더불어 상고시대의 성천자(聖天子) 오제(五帝)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맹자는 인생삼락(三樂)을 말함에 있어 천하에 왕이 되는 것 따위는 그 세 가지 낙(樂) 중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부모구존(俱存)과 형제무고(無故)를 일락(一樂)으로 꼽았다. “성인 요순(堯舜)의 도는 효제(孝悌)뿐”이라며 맹자는 효제를 중시했다. 어느 날 순은 “부모의 뜻을 따르..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 내 가슴은 뛰노라 / 나 어렸을 때도 그랬고 /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다/ 늙어서도 그러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리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 바라노니 내 생애 하루하루가 자연에의 경건함으로 가득 차기를 (‘무지개’ 전문)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의 시 ‘무지개’의 일구다. 60여 년 전, 교실에서 암송한 이 시는 내 나이 50 중반까지는 입에 남아 있었던 같다. 졸업 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상원사 적멸보궁 참배에 동참했는데 때는 바야흐로 신록이 아름다운 초여름 밤이었다. 눈과 맞닿은 광활한 하늘에선 금강석 같은 별들이 반짝이고 내 가슴도 콩닥콩닥 뛰었다. “My heart leaps up when I..

五蘊皆空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할 때, 존재의 실상인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느니라. 반야심경’의 서두로 불교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알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붓다의 처방전이기도 하다.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내(我)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존재를 5온(蘊) 즉 몸(색·色)과 정신적 요소인 수상행식(受想行識:감수· 표상·결합·분별작용)의 다섯 요소로 규정한다. 마치 여러 목재가 모여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오온이 모인 것을 존재(중생·衆生)라고 부른다. 어느 하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오온에 아(我)는 없다. 무아(無我)다. “끌어모아서 얽어매면 한 칸의 초가집. ..

則天去私

道法自然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노자 ‘도덕경’의 말씀이다. 천지 만유(萬有)에 앞서 자연의 도가 있었다. 도에서 천지가 생겼고 만물이 생겼다. “사람은 땅을 법(法)하며, 땅은 하늘을 법한다. 하늘은 도를 법하고 도는 자연을 법한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가 그것이다. 도가 자연을 법한다는 것은 자연과 일치해 자연 그대로가 되는 것이다. 도 본연의 모습은 자연이다. 적막(寂寞)함이여, 요원(寥遠)함이여, 적막하고도 쓸쓸하다. 도야말로 천지 만유를 낳은 근본이며, 만유를 낳은 어머니인 것이다. 내 그 이름을 모르니, 이를 가로되 ‘도(道)’라 하고 굳이 이를 이름하면 ‘대(大)’라 한다. 대를 가로되 ‘서(逝)’라 하고, 서를 가로되 ‘원(遠)’이라 하고 원을 가로되 ‘반(反)’이라 한다. 간다..

자연은 藥과 같다

자연은 영혼을 치유하는 성소(聖所)다 미국의 사상가이며 에세이스트인 에머슨이 ‘자연론’에서 한 말이다. 그는 결혼 1년 반 만에 신부를 잃고 충동적으로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고 재혼해 얻은 아들이 갑자기 성홍열로 죽자 비통한 심정을 에세이 ‘경험’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이 전나무의 나뭇가지에 감겨 있듯, 죽음은 살아가는 동안 우리 눈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다가 차츰 흐릿해지고 만다.” 그러나 그는 비탄과 무상감에 오래 빠져 있지 않았다. ‘아무리 큰 슬픔이 있더라도 나와 함께 있으면 즐거울 것’이란 자연이란 경전의 말씀을 경청하면서부터였다. “자연은 약(藥)과 같다. 해로운 일이나 어려움 때문에 망가진 몸과 마음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준다”며 에머슨은 “자연은 영혼을 치유하는 성..

월든 호숫가의 소로

자연을 놓고 천국을 이야기하다니! 그것은 지구를 모독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월든’의 한 구절이다. 1845년 3월 그는 월든 호수 근처에 방 한 칸짜리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 동안 혼자 살았는데 이때의 기록이 ‘월든’이다. 숲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삶의 본질적인 것들만 대면하고 싶었고, 죽음을 맞게 됐을 때 헛되지 않게 살았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칩거 이유를 밝혔다. 44세이던 1862년 5월 6일, 폐결핵으로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여동생에게 자신이 쓴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나슈아 어귀를 지나쳤고, 곧 새먼 부룩도 지나칠 즈음, 우리의 배를 가로막는 것은 바람밖에 없었다.” 이때 소로는 나직이..

생명

느릅나무 토막은 이미 단두대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차마 그 목에 톱질을 할 수는 없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의 수필 ‘느릅나무’의 한 구절이다. 원고지 채 2장도 되지 않는 짧은 글에 강타당한 기분 좋은 충격, 그건 카프카의 ‘도끼’처럼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충격이었다. ‘나는 톱으로 장작을 켜다가 느릅나무 토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난해에 느릅나무를 잘라 트랙터로 운반하다가 토막을 쳐서 더러는 뗏목에 쓰기도 하고 어떤 것은 통나무째 쌓아 두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땅에 굴려 두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느릅나무 토막에서 파르스름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싹은 장차 느릅나무로 크거나 우거진 나뭇가지가 될 수도 있는 어김없는 하나의 생명체였다. 느릅나무 토막은 이미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