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558] 내시구로 (來時舊路)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송나라 때 원거화(袁去華)의 '서학선(瑞鶴仙)'이란 작품이다. "교외 들판 비 지난 뒤, 시든 잎 어지럽게, 바람 잔데 춤을 춘다. 지는 해 나무에 걸려, 근심겹게 고운 모습. 먼 산이 어여뻐도, 올 적에는 예전 길로. 아직도 바위의 꽃, 어여쁜 황색 반쯤 폈네. 지금에 와서 보니, 냇가엔 흐르는 물, 사람은 전과 같고(郊原初過雨, 見敗葉零亂, 風定猶舞. 斜陽挂深樹, 映濃愁淺黛. 遥山眉嫵, 來時舊路. 尚巖花, 嬌黄半吐. 到而今, 唯有溪邊流水, 見人如故)." 들판에 비가 지나가자 시든 잎이 진다. 비가 개더니 석양이 걸렸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다. 반쯤 핀 국화, 냇물 소리도, 세상과 사람도 그대론데 그것을 보는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추사 김정희의 글이다. "책을 저술하..

[정민의 世說新語] [557] 육요사병 (六要四病)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이 남긴 산호벽수(珊瑚碧樹)는 그가 평생 추종했던 추사의 글씨를 옮겨 적어둔 적바림이다. 이 중 한 단락. "그림 그리는 법에는 여섯 가지 요점이 있다. 신(神)과 청(淸), 경(勁)과 노(老), 활(活)과 윤(潤)이 그것이다. 네 가지 병통이 있다. 강필(僵筆)과 고필(枯筆), 흐린 거울이나 흙탕물 같은 탁필(濁筆), 골력이 없는 약필(弱筆)이 그것이다(畵有六要, 神淸勁老活潤. 有四病, 僵筆枯筆濁如昏鏡渾水, 弱筆無骨力)." 이른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명심해야 할 육요사병(六要四病), 즉 여섯 가지 핵심과 네 가지 병통에 대한 지적이다. 먼저 육요. 첫째는 신(神)이다. 손끝의 재주가 아닌 정신의 깊이를 담아야 한다. 둘째는 청(淸)..

[정민의 世說新語] [556] 패위회목 (佩韋晦木)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주자가 고정서원(考亭書院)에서 쓴 두 구절이다. "무두질한 가죽 참은 부친 훈계를 따름이요, 나무가 뿌리를 감춤은 스승이 전한 삼감일세(佩韋遵考訓, 晦木謹師傳)." 시 속의 패위(佩韋)와 회목(晦木)은 출전이 있다. 주자의 부친 주송(朱松)은 호가 위재(韋齋)다. 위(韋)는 무두질한 소가죽이다. 주송은 조급한 성질이 도를 해친다며 이 말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예전 성정이 조급한 사람은 몸에 무두질한 가죽을 차고 다녀 자신을 경계하곤 했다. 조급한 성질을 무두질해 결을 뉘어야 비로소 큰 공부를 할 수가 있다. 회목은 뿌리를 감춘 나무다. 재능을 안으로 갈무리해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다. 스승 유자휘(劉子翬)가 주자를 위해 써준 '자주희축사(字朱熹祝詞)'에서 말했다...

[정민의 世說新語] [555] 대오구금 (臺烏久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다산이 '양성이 바른말로 간하지 않아 한유가 나무란 것을 당나라 신하들이 축하하다(唐羣臣賀韓愈書責陽城以不諫)'란 글에서 썼다. "옳은 길로 권면함이 도리이건만, 장마(仗馬)가 울지 않음 개탄스럽네. 어이 일이 없는데 말을 하겠나? 대오(臺烏)가 오래 입 다묾을 탄식하노라(責以善是道也, 慨仗馬之不鳴. 豈無事可言耶? 歎臺烏之久噤)." 장마불명(仗馬不鳴)과 대오구금(臺烏久噤)은 고사가 있다. 당나라 때 보궐(補闕) 두진(杜璡)이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국정 농단을 간언했다가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떠나기 전 동료들에게 말했다. "자네들, 입장마(立仗馬)를 보지 못했나? 종일 울지 않으면 꼴과 콩을 실컷 먹고, 한 번이라도 울면 쫓겨난다네. 쫓겨난 뒤에는 비록 울지 않으려 한들 무슨 ..

[정민의 世說新語] [554] 응신식려 (凝神息慮)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장자가 숲에서 매미를 잡고 있는 곱추를 만났다. 그는 떨어진 물건 줍듯 매미를 쉽게 잡았다. "방법이 있습니까?" "매미에게만 집중합니다. 매미를 잡을 때의 몸놀림은 마치 나무 등걸 같고, 팔은 고목 가지 같지요. 나는 꼼짝도 않고 몰입해서 천하 만물로 매미 날개와 바꾸지 않습니다." 장자(莊子) '달생(達生)'편에 나온다. 그의 말을 들은 공자가 감탄했다. "뜻 쓰기를 나누지 않아야만 정신이 한곳에 모인다(用志不分, 乃凝於神)." '응(凝)'은 똘똘 뭉쳐 응축된 상태다. 쓸데없는 곳에 마음을 흩지 않고, 오로지 한곳에 정신을 집중한 상태가 응신(凝神)이다. 송나라 진백(陳柏)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서 말했다. "일이 생겨 응대할 땐 행동으로 증명한다. 밝은 천명 환하거..

[정민의 世說新語] [553] 삼절삼멸 (三絶三滅)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공자가 만년에 '주역'을 좋아해서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지고, 쇠바늘이 세 번 부러졌으며, 검게 쓴 글씨가 세 번 뭉개졌다(孔子晩善易, 韋編三絶, 鐵撾三折, 漆書三滅)." '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책(冊)이란 글자의 생긴 모양에서도 알 수 있듯, 죽간의 위쪽에 구멍을 내어 가죽끈으로 발을 엮듯 만든 것이 종이 발명 이전의 책 모양이었다.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너덜너덜해져서 세 번이나 끊어졌다. 이것이 삼절(三絶)이다. 또 대나무 구멍으로 가죽끈을 꿰려고 바늘을 쑤셔 넣다 보면 바늘 허리가 자꾸 부러진다. 이것은 삼절(三折)이다. 대나무 조각에 쓴 먹글씨는 손때가 묻어 세 번이나 지워졌다. 이것이 삼멸(三滅)이다. 요즘 식으로 말해 책을 하도 읽어 종이가 너덜너덜해지..

[정민의 世說新語] [552] 지려작해 (持蠡酌海)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새해 벽두에 고려 나옹(懶翁) 스님의 '탄세(嘆世)'시 네 수를 읽어 본다. 첫 수는 어둡다. "세상 일 어지럽다 언제나 끝이 날꼬. 번뇌의 경계만이 배나 더 많아지네. 미혹(迷惑)의 바람 땅을 깎아 산악을 뒤흔들고, 업장(業障)의 바다 하늘 가득 물결을 일으킨다. 죽은 뒤의 망령된 인연 다시금 모여들고, 눈앞의 광경은 어둡게 사라지네. 구구하게 평생의 뜻 애를 써 보았지만, 가는 곳마다 그대로라 어찌하지 못하네(世事紛紛何日了, 塵勞境界倍增多. 迷風刮地搖山嶽, 業海漫天起浪波. 身後妄緣重結集, 目前光景暗消磨. 區區役盡平生志, 到地依先不奈何)." 미망과 업장을 못 떨쳐 세상은 늘 어지럽고, 번뇌는 깊어만 간다. 아등바등 뭔가 이뤄보겠다고 애를 써보지만, 하던 대로 하고 가던 길로만..

[정민의 世說新語] [551] 취문추지 (就紊墜地)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허균(許筠·1569~1618)이 쓴 '관론(官論)'을 읽었다. 국가조직의 문제점을 꼬집은 내용이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관직을 멋대로 늘리면 권한이 분산되어 지위가 높아지지 않는다. 인원이 많을 경우 녹(祿)만 허비하면서 일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서 잘 다스려지는 이치는 결코 없다." 이어 불필요하게 자리 수를 늘린 결과 국가 예산을 잡아먹고 소관 다툼만 하게 만드는 불합리한 부서 배치의 예를 들었다. 종실(宗室)의 친인척 관리는 종인부(宗人府) 하나면 충분한데, 종실과 제군(諸君)에 관한 일을 맡은 종친부(宗親府), 공주와 옹주 및 부마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의빈부(儀賓府)를 각각 두고, 왕실의 족보와 종실의 잘못을 조사 규탄하는 종부시(宗簿寺)를 따로 운영..

[정민의 世說新語] [550] 습정양졸 (習靜養拙)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우왕좌왕 분주했고 일은 많았다. 부지런히 달려왔지만 손에 쥔 것은 별로 없다. 세밑 언덕에 서니 이게 뭔가 싶어 허망하다. 신흠(申欽·1566~1628)의 '우감(偶感)'시 첫 수는 이렇다. "고요 익혀 따지는 일 잊어버리고, 인연 따라 성령(性靈)을 길러보누나. 손님의 농담에 답할 맘 없어, 대낮에도 산집 빗장 닫아둔다네(習靜忘機事, 隨緣養性靈. 無心答賓戲, 白晝掩山扃)." 고요함에 익숙해지자 헤아려 살피는 일도 심드렁하다. 마음 밭은 인연 따라 흘러가도록 놓아둔다. 작위하지 않는다. 실없는 농담과 공연한 말이 싫다. 산자락 집 사립문은 대낮에도 굳게 잠겼다. 나는 나와 대면하는 게 더 기쁘다. 나는 더 고요해지고 편안해지겠다. 이수광(李睟光·1563~1628)도 '무제(無題..

[정민의 世說新語] [549] 낙화유수 (落花流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남인수 선생의 노래 '낙화유수' 원곡을 여러 날 들었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낙화유수 네 글자에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 어여쁘던 꽃이 물 위로 진다. 물결 따라 흘러간 꽃잎은 어디로 갔나. 2절.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3절. "사람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러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 소식을 편지로 쓰자." 가사가 가락에 얹혀 낭창낭창 넘어간다. 봄이 가고 꽃이 진다. 진 꽃잎은 물 위로 떨어져 세월에 실린 꿈처럼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