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92

선쥔산 회유 실패한 쉬자툰, 진융 집 만남 엉터리 기록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9〉 1997년 7월 1일 0시, 영국은 홍콩을 중국에 반환했다. 육, 해, 공 3군이 동시에 진입했다. 6월 30일 밤, 홍콩진입을 대기하는 중국인민해방군 홍콩주둔 부대. 한국전쟁 시절 중국지원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천껑의 아들이 지휘했다. 그날 밤비가 ..

쉬자툰 “일국양제 매섭게 비판하는 선쥔산 이해시킬 필요”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8〉 문혁 10년은 천주더(앉은 사람 오른쪽 첫째)의 청춘을 삼켜버렸다. 문혁이 끝난 후 40이 넘은 나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네웨이핑(앉은 사람 오른쪽 둘째)과 후룽화(앉은 사람 왼쪽 첫째)의 대국을 지켜보는 천주더. 1980년 1월, 수저우창랑..

쉬자툰 “선쥔산이 홍콩 오면 바둑 두게 자리 만들어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7〉 진융(뒷줄 왼쪽 둘째)은 신문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밍바오(明報)를 창간하며 경영을 위해 무협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다궁바오(大公報) 기자시절의 모습. [사진 김명호] 흔히들 선쥔산(沈君山·심군산)과 롄잔(連戰·연전), 천..

덩샤오핑 “이 정도 거리 두면 대만은 언젠가 우리 품으로 온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6〉 랑징산은(왼쪽 둘째) 화가 장다첸(張大千·오른쪽 첫째)과 죽이 잘 맞았다. 장다첸을 소재로 명작을 많이 남겼다. 1995년 10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중공은 평화를 노래하며 비 당원과 반대파를 ..

쉬자툰의 환대, 친대만파 간판 샤오이푸 마음 녹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5〉 샤오이푸가 설립한 쇼브라더스는 린다이(林黛), 리리화(李麗華) 등 당대의 명우들을 배출한 동방의 할리우드였다. 저우룬파(周潤發), 류더화(劉德華), 량자오웨이(梁朝偉)도 훈련반에서 연기를 닦았다. 1960년대 말 해외 촬영 차 출국중인 쇼..

쉬자툰 ‘구대동 존대이’ 선언하자 친대만계 인사들 환호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4〉 문혁 시절 홍콩 좌파들은 해만 지면 집회를 열고 마오쩌둥 사상 강의를 경청했다. 1967년 위안랑 인근. [사진 김명호] 신화통신 홍콩분사에는 통일전선(통전)의 고수들이 즐비했다. 사장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의 회고를 소개한다. “홍콩은..

쉬자툰 “중국 공산당 비판도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3〉 문혁시절 홍콩 좌파는 지금의 신계(新界)지역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했다. 마오쩌둥 어록을 낭송하는 아동들. 1969년 홍콩 신계. [사진 김명호] 개혁처럼 듣기 좋은 말도 없다. 대단한 것 같지만 별것도 아니다. 개방만 시키면 개혁은 저절로 ..

베일에 싸였던 신화통신 홍콩분사, 중공 지하당원이 절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2〉 랴오청즈(앞줄 오른쪽 셋째)는 한반도와도 인연이 많았다. 1951년 1월, 중국지원군 위문단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다. [사진 김명호]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북벌과 항일전쟁을 위해 두 차례 합작했다. 1차 합작시절(1924~27) 국·공 양당은 소련..

“조국 통일을 위해 왔다”…쉬자툰 한마디에 홍콩이 발칵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1〉 1983년 6월 30일 오후, 홍콩에 도착한 쉬자툰. 진한 색안경과 허름한 복장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상하이에서 춘제(春節)를 보내곤 했다. 1983년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이에서 푹 쉬고 춘제 기간이 끝나자 ..

“중국, 한국 국호 인정 않으면 손님이 주인 따귀 갈기는 것”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0〉 쭤창런은 도박과 투기로 보상금을 탕진하자 병원 부원장 아들을 유괴, 살해했다. 1997년 사형선고를 받았다. 집행은 민진당 집권 초기인 2000년에 했다. [사진 김명호]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에 발생한 중국민항기 춘천 불시착은 적당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