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51) 한산도가(閑山島歌)

(51) 한산도가(閑山島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한산도가(閑山島歌) 이순신(1545∼1598) 한산섬 달 밝은 밤의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나의 애를 끊나니 - 병와가곡집 성탄 전야에 생각하는 충무공 마음의 눈물 없이 이 시조를 읊을 수 있다면 그는 한국인이 아니다. 전란의 시기, 밤이 깊은 삼도수군통제영. 적정(敵情)을 살피는 망루에 통제사가 홀로 앉아 있다. 언제나 긴장을 풀 수 없기에 큰 칼을 차고 있으나 근심이 깊다. 짓누르는 책임감, 외로움이 천근만근이다. 그때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한 자락 풀피리 소리. 에일 듯 끊어질 듯 마음이 아프다. 장군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가 있었을까? 연전연승 전쟁의 신에게도 이런 마음의 ..

(50) 겨울 정동진

(50) 겨울 정동진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겨울 정동진 김영재 (1948∼ ) 나를 버리러 왔다가 너무 쓸쓸해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챙겨 돌아선 바닷가 겨울 간이역 첫사랑 언 새벽 -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47 ‘참 맑은 어둠’ 고통을 묵묵히 견디는 모습들 첫사랑. 그 황홀한 무서움이여. 어쩌면 사랑을 잃고 겨울 정동진을 찾았을 것이다. 너무 쓸쓸해 나를 버리지 못했다는 표현이 애잔하다. 다시 챙긴 목숨을 싣고 떠나는 새벽 열차가 긴 여운을 남긴다. 겨울 간이역의 모습을 이보다 더 이상 절실하게 그릴 수 있을까? 코로나바이러스에게 빼앗긴 이 겨울이 너무나 쓸쓸하다. 사람들이 자취를 감춘 세모의 풍경이 눈물겹기만 하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렇게 사람을 피하고만 있으면..

(49) 호기가(豪氣歌)

(49) 호기가(豪氣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호기가(豪氣歌) 김종서(1383∼1453)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보기 드문 남성적 정서의 시 한국 시의 주된 정서는 여성적이다. 문자로 전해지는 최초의 한국 시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고구려의 황조가(黃鳥歌), 백제의 정읍사(井邑詞), 신라 향가의 상당수가 여성적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는 고려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고, 고시조도 여성적 서정이 주조를 이룬다. 이는 한국인 전통의 한(恨)의 정서와도 결을 같이 한다. 그런데 드물게 강한 남성 취향의 노래가 있으니 바로 김종서의 이 시조다..

(48) 팽이

(48) 팽이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팽이 이우걸 (1946∼ )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 한국대표명시선100 ‘어쩌면 이것들은’ 의인 열사가 그리운 시대 가혹한 자기 단련의 시다. 팽이를 치고 쳐서 최고의 속도에 이르면 무지개가 보인다, 아무리 나를 쳐도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겠다는 결기가 드러난다. 이 시조의 대단원은 역시 종장이다. 그 무수한 고통을 건너면 접시꽃 하나 피어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시조 이미지 전개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의인을 만나기 드문 시대, 지사가 사라진 시대. 우리는 의인 열사가 그립다. 이런 지사는 어떤 가혹한 매가 내려치더라도 끝내 이를 견뎌 꼿꼿이 서서 너를 ..

(47) 동짓달 기나긴 밤

(47) 동짓달 기나긴 밤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동짓달 기나긴 밤 황진이 (1506∼?)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 청구영언 시조가 보여주는 절정의 아름다움 일년 중 가장 긴 동짓달의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서 봄바람을 품고 있는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그리운 님이 오신 날 밤에 구비구비 펴겠다니 그 긴 밤이 얼마나 달콤하고 행복할까? 절정의 비유이며, ‘서리서리’ ‘구비구비’ 같은 우리 말의 표현도 절정의 수준이다. 우리는 이 시조 한 편으로 시의 천재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으나 문학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명편들이..

(46) 다 못 쓴 시

(46) 다 못 쓴 시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다 못 쓴 시 유재영 (1948∼) 지상의 벌레 소리 씨앗처럼 여무는 밤 다 못 쓴 나의 시 비워 둔 행간 속을 금 긋고 가는 별똥별 이 가을의 저 은입사(銀入絲)! - 한국대표명시선100 ‘변성기의 아침’ 일물일어(一物一語)의 시인 시의 계절 가을. ‘가을 시’ 연작 두 번째 작품이다. 가을밤의 풍경을 직정적(直情的)으로 그렸다. 이를 시인의 시적 심상(心象)과 연결함으로써 그림 같은 격조 높은 시가 되었다. 은입사란 청동이나 주석 등에 새겨 넣은 은줄이다. 국보 92호로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이 있다. 별똥별의 흐름을 은입사로 본 시인의 눈이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한가.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하나의 사물을 지적하는 데..

(45) 조홍시가(早紅柹歌)

(45) 조홍시가(早紅柹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조홍시가(早紅柹歌) 박인로 (1561∼1642)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 - 노계집(盧溪集)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선조 34년(1601), 무인 노계 박인로(朴仁老)가 한음 이덕형의 집을 찾았다. 그때 손님 대접하느라 일찍 익은 감이 소반에 담겨 나왔다. 참으로 곱다. 그것을 본 노계는 문득 중국 후한 때의 육적(陸績)의 일을 생각한다. 여섯 살 어린 육적이 친구 원술(袁術)의 집에 갔을 때 귀한 유자가 나왔다. 그것을 집에 가져가 어머니께 드리려고 가슴에 몰래 품었다는 육적회귤(陸績懷橘)의 고사다. 그해 가을 첫 감을 본 노계는 어버이를 생각한다...

(44) 가을은

(44) 가을은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가을은 김월준 (1937∼) 가을은 홍시처럼 빨갛게 익어 가고 가을은 하늘처럼 파랗게 깊어 가고 가을은 가랑잎처럼 한잎 두잎 져 가고······. - 한국시조큰사전 코로나 패러독스로 더 고운 가을 코로나 패러독스란 말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적 대유행을 하고 인간의 행동이 멈춰 서자 자연이 회복되는 기현상이다. 지난해도 우리는 마스크를 끼고 살았다. 그때는 미세먼지 때문이었다. 평생 미세먼지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올 들어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고 각국이 봉쇄 조치로 문을 걸어 닫자 희한하게도 공기가 맑아졌다. 꿈처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해마다 개체 수가 줄어가던 바다거북 서식지에는 산란하러 오는 거북 수가 올해 늘고 있다고 한다. 그..

(43)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추사(秋詞) 2

(43)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추사(秋詞) 2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 추사(秋詞) 2 윤선도 (1587∼1671)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만경징파(萬頃澄波)에 슬카지 용여하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을 돌아보니 머도록 더욱 좋다 - 고산유고(孤山遺稿) 직간(直諫)으로 난세에 보답한 시인 고산 윤선도(尹善道)가 1651년(효종 2년) 65세 때 완도 보길도 부용동을 배경으로 고려 후기의 ‘어부가’와 이현보의 ‘어부사’ 전통을 이어받아 창작했다. 그는 어부의 생활을 4계절로 나누어 춘사, 하사, 추사, 동사 각 10수씩 연시조로 지었다. 그가 지은 ‘오우가(五友歌)’와 함께 연시조 전통이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 작품은 ‘추사’ 두 번째..

(42) 섬·2

(42) 섬·2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섬·2 진복희 (1947∼) 그대는 모르오리 한 바다 품은 죄를 떠도는 그 바다에 무릎 꿇고 앉은 형벌 모르리 물보라를 끓이고서도 다시 서는 불기둥 - 우리시대현대시조100인선 33 ‘불빛’ 사랑을 독차지하면 그것도 죄다 넓은 바다에 섬 하나. 그 바다를 홀로 품은 죄 얼마나 큰지 모르다니…. 그래서 바다는 떠돌건만 홀로 무릎 꿇고 형벌을 받는구나. 아, 그 섬을 휘감아 물보라를 끓이고서도 다시 서는 불기둥이라니, 사랑은 이렇게 모질고도 숙명적인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사랑의 모습을 한 바다에 외로운 섬 하나로 그려냈다. 시인의 천재성에 감탄한 월하 이태극이 1967년과 68년 시조문학 3회 추천으로 등단시켰으니 스물한두 살 때였다. 이승하 교수는 ‘진복희의 시조를 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