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81) 연정가(戀情歌)

(81) 연정가(戀情歌) 중앙일보 입력 2021.07.22 00:16 유자효 시인 연정가(戀情歌) 무명씨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 곧 날작시면 님 계신 창밖이 석로(石路)라도 닳으리라 꿈길이 자취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 병와가곡집 간절하고 애틋한 사랑 노래 만약 내가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가 난다면 님 계신 창밖이 돌로 된 길이라 하더라도 닳을 것이다. 그러나 꿈길이 자취가 없어 님에게 보여드릴 수 없으니 그것이 슬플 뿐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간절한 연시다. 이옥봉의 한시에 이와 유사한 작품이 있다. 근래안부문여하(近來安否問如何) 요즘 안부 묻습니다. 잘 계신지요? 월도사창첩한다(月到紗窓妾恨多) 달 비친 비단 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약사몽혼행유적(若使夢魂行有跡) 꿈속 혼이 다닌 길에 자취가 남는다면..

(80) 수화(手話)

(80) 수화(手話) 중앙일보 입력 2021.07.15 00:16 유자효 시인 수화(手話) 이승은 (1958∼) 허공을 가르던 소리, 낱낱의 꽃이 된다 혀가 놓친 말들이 저리 선연히 타올라 살아서 더욱 뜨거운 피가 돌고 있으니······ -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52 ‘술패랭이꽃’ 위대한 몸짓 언어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이후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TV에서 수화를 보고 있다.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로 일상 멈춤에 들어가고 백신 물량이 동나 접종 예약이 중단되는 등 사태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현장 생중계 발표가 많이 이루어지고 그때마다 수화 통역사가 등장해 발표 내용을 함께 전한다. 자주 나오는 수화 통역사는 이제 낯이 익기도 하다. 스타 수화사도 탄생하겠다. 시인은 수화가 ‘혀..

(79) 오백 년 도읍지를

(79) 오백 년 도읍지를 중앙일보 입력 2021.07.08 00:16 유자효 시인 오백 년 도읍지를 길재(1353∼1419)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 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 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병와가곡집 역사를 바로 보아야 한다 광화문에 나갔다. 온통 파헤쳐진 지하에 조선 시대 육조 터가 드러나 있었다. 이곳에서 세종 때 주조된 훈민정음 금속 활자가 발견되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발견이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광화문과 경복궁이 복원됐고 이제 육조거리도 복원될 것이다. 경복궁을 굽어보고 있는 인왕산도 조선 때 모습 그대로이다. 이렇게 산천은 그대로 있건만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간 곳이 없다. 소개한 시조는 고려 삼은(三隱)의 한 분인 야은(冶隱) 길재(..

(78) 삶이란

(78) 삶이란 중앙일보 입력 2021.07.01 00:16 유자효 시인 삶이란 민병도 (1953~) 풀꽃에게 삶을 물었다 흔들리는 일이라 했다 물에게 삶을 물었다 흐르는 일이라 했다 산에게 삶을 물었다 견디는 일이라 했다 - 한국대표명시선 100 〈장국밥〉 화가이자 시인이 보는 삶 삶이란 무엇일까? 풀꽃에게 물었더니 ‘흔들리는 일’이라 한다. 물에게 물었더니 ‘흐르는 일’이라 한다. 산에게 물었더니 ‘견디는 일’이라 한다. 삶의 모습은 이렇듯 다양하다. 화자에 따라 정의가 달라진다. 삶이란 그 어떤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의 총화일 것이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죽어가고 있다. 우리 생애에 병으로 인한 최대의 재앙을 겪고 있는 중이다. ..

(77) 삼각산아 한강수야

(77) 삼각산아 한강수야 중앙일보 입력 2021.06.24 00:16 유자효 시인 삼각산아 한강수야 김상헌 (1570∼1652)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와가곡집 이기기 위해서 군대를 양성한다 1637년 2월 24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의 숭덕제 앞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절하는 항복 의식을 치름으로써 석 달 동안의 치열했던 병자호란은 끝났다. 전쟁 포로로 수십만에 이르는 백성들이 청에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대했으니 환향녀(還鄕女), 호로(胡虜)자식 등이 그때 생겨난 말들이다.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은 전범으로 찍혀 소현세자·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잡..

(76) 백하(白夏)·1

(76) 백하(白夏)·1 중앙일보 입력 2021.06.17 00:16 유자효 시인 백하(白夏)·1 백이운(1955∼) 천둥 번개가 찢고 간 조선의 여름 하늘 우리 하느님 하얀 모시적삼 피 배듯 피 배듯 왁자한 쓰르라미 붉은 울음. -우리시대현대시조100인선 50 ‘슬픔의 한복판’ 신(神)이 울었던 그해 여름 흰옷 입은 백성들의 나라 조선의 여름은 희다. 그 여름 하늘을 천둥 번개가 찢고 간다. 1950년 6월 25일. 오! 나의 하느님이시여.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하얀 모시적삼에 피 배듯 쓰르라미가 왁자하게 붉은 울음을 자지러지게 운다. 그 무서웠던 여름을 절제된 감성으로 그려냈다. 백이운 시인은 ‘흰 여름’을 주제로 한 스물여섯 편의 시조를 썼다. 그 마지막 작품은 이러하다. 조선 낫으로도 끝..

(75) 시절이 저러하니

(75) 시절이 저러하니 중앙일보 입력 2021.06.10 00:16 유자효 시인 시절이 저러하니 이항복(1556∼1618) 시절이 저러하니 인사도 이러하다 이러 하거니 어이 저러 아닐소냐 이런자 저런자 하니 한숨 겨워 하노라 - 청구영언 조선판 내로남불 한음 이덕형과 함께 오성 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이항복(李恒福)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병조판서를 지낸 전란 극복의 명신이었다. 행주대첩의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죽음을 면하게 했다. 그러나 광해군을 등에 업은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임해군과 영창대군 살해사건 등이 터졌다. 서인의 대표 격이었던 그는 북인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시조는 북인 집권 시의 인사 난맥과 ..

(74) 6월 뻐꾸기

(74) 6월 뻐꾸기 중앙일보 입력 2021.06.03 00:16 유자효 시인 6월 뻐꾸기 이처기 (1937∼) 버려진 철모가 휴전선 미루나무 아래서 쓰르럭 쓰르럭 녹이 슬고 있는 되뱉지 않으려 해도 끽끽거리는 6월 한낮 - 시조시학(2020 겨울) 전쟁의 비극은 당사자들의 몫이 된다 다시 6월. 자다가도 문득 가위눌려 깨는 달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우리는 이 고통, 이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른다 해서 그 한(恨)들을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뜨거운 한낮, 휴전선 미루나무 아래 버려진 철모가 쓰르럭 쓰르럭 녹이 슬고 있다. 이 계절 뻐꾸기는 끽끽거리며 운다. 뻐꾸기야 제 울음을 울겠지만 아직도 진행형인 고통 속의 듣는 이는 되뱉어지지 않는 아픔의 소리로 들린다. 이런 소리를 ..

(66) 휴대전화

(66) 휴대전화 중앙일보 입력 2021.04.08 01:46 유자효 시인 휴대전화 오세영(1942~ ) 조찰히 문갑 위에 앉아 있던 휴대전화 갑자기 몸 비틀어 부르르 떨고 있다. 물건도 할 말을 못하면 저렇게도 분한가. - 문학나무(2004년 여름) 시조는 한민족의 자랑 소리를 못 내게 했더니 온몸으로 떠는 전화. 물건도 할 말을 못하면 저렇게도 분해하는데…. 이 작품은 휴대전화의 진동 모드를 재치 있게 묘사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사에 빗대도 다르지 않다. 언로가 막히면 그 분함을 온몸으로 떨며 저항하지 않는가? 내전으로 치닫고 있는 미얀마의 대규모 유혈 시위도 그런 분노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오세영 시인이 서울대 국문학과 조교수로 봉직하던 1987년 가을 학기에 미국 아이오아 대학의 국제 창작 프로그램..

(73)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73)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이이 (1537-1584) 제2곡 화암(花巖) 이곡(貳曲)은 어디메오 화암에 춘만(春晩)커다 벽파(碧波)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한들 어떠리 - 율곡전서(栗谷全書) 천재도 극복하지 못한 난세(亂世) 이이(李珥)가 43세 때 해주 석담(石潭)에 은거하며 지은 10수의 연시조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이다. 서시에 이어 관암(冠巖)의 아침을 즐기는 제1곡, 그리고 꽃바위의 늦봄 경치를 읊은 것이 제2곡이다.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멀리 들판으로 보내 이 아름다운 곳을 모르는 사람들이 알게 하면 어떻겠는가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조는 주희(朱熹)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서 지었다고 하나 율곡의 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