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72) 마음

(72) 마음 중앙일보 입력 2021.05.20 00:16 유자효 시인 마음 허영자 (1938∼) 마음이 모나면 세상도 모나고 마음이 둥글면 세상도 둥글단다 오늘은 마음 푸르니 세상 또한 푸르러라. - 한국현대시조대사전 5월에는 행복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음’이라고 하겠다. 모든 것이 마음에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한 마디에 팔만대장경의 우주가 다 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허영자 시인이 이런 세계를 시조로 읊었다.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가? 마음이 푸르면 세상 또한 푸르러 지니….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대작 ‘레 미제라블’에서 이렇게 썼다. “바다는 넓다. 바다보다 넓은 것은 하늘이다. 그러나 하늘보다도 더 넓은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때..

(71) 마음이 어린 후(後)

(71) 마음이 어린 후(後) 중앙일보 입력 2021.05.13 00:16 유자효 시인 마음이 어린 후(後) 서경덕(1489~1546)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 병와가곡집 아름답고도 애절한 사랑 노래 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애틋하다. 시인은 자신의 그런 마음을 어리석다고 자책한다. 노심초사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한다. 겹겹이 구름 낀 산중에 님이 올 리가 없다. 그런데도 잎이 지고 바람 소리 들리면 행여 님이신가 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겠는가? 이 간절한 연시를 남긴 이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다. 이 시조는 당대의 명기 황진이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70) 어머니

(70) 어머니 중앙일보 입력 2021.05.06 00:16 유자효 시인 어머니 박구하(1946∼2008) 만약에 나에게도 다음 생이 있다면 한 번만 한 번만 더 당신 자식 되고 싶지만 어머니 또 힘들게 할까 봐 바랄 수가 없어라 - 유고 시집 ‘햇빛이 그리울수록’ 가정은 사랑의 원천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제는 어린이날이었고, 모레는 어버이날이다. 세상에 가정처럼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모든 사랑의 원천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근원이다. 시인은 만약에 다음 생이 있다면 한 번만 더 당신의 자식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또 힘들게 할까 봐 바랄 수가 없다고 한다. 세상에 많은 사모곡(思母曲)을 봐 왔지만 이렇게 간절한 시는 처음 보았다.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금융업계에 종사하던 박구..

(69) 태산이 높다하되

(69) 태산이 높다하되 중앙일보 입력 2021.04.29 00:17 유자효 시인 태산이 높다하되 양사언(1517∼1584)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 병와가곡집 “세상에 ‘펑’하고 일어나는 일은 없다” 한국인의 인생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조가 이 작품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널리 애송되는 시조다.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도 시작은 첫걸음에서 비롯된다. 풍설(風雪)과 산소 희박, 고산증과 눈사태 등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내디딘 걸음걸음이 끝내는 정상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 평범한 진리를 끝까지 이루어낸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해도 하늘 아래 있는 산이다. 오르고 또 오르면 오를 수 ..

(68) 돌담장의 안녕

(68) 돌담장의 안녕 중앙일보 입력 2021.04.22 00:18 유자효 시인 돌담장의 안녕 김봉군(1942∼ ) 아랫돌이 윗돌에게 업어줘서 고맙댔어 윗돌이 아랫돌에게 업혀줘서 고맙댔지 몇 백 돌 몇 천 돌들이 입을 모아 고맙댔네 - 시조생활 2021 봄호 “이 역사를 어찌할 것인가?” 지금도 제주도에 가면 보이지만 우리의 전통 담은 마을 주변에 흔히 보이는 돌을 주워 쌓았다. 큰 돌 작은 돌들로 틈을 메워 쌓은 돌담은 밖에서 집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허술하기도 했다. 큰 돌이 저보다 작은 돌을 업고 그 돌은 또 저보다 작은 돌을 업고 하나의 담을 이뤄 사이좋게 서 있는 양을 보면 돌들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서로가 서로더러 입을 모아 고맙다 하는 것이 우리의 돌담장이다. 한민족이 반만년을 이어온 힘이..

(67) 사랑이 어떻더니

(67) 사랑이 어떻더니 중앙일보 입력 2021.04.15 00:18 유자효 시인 사랑이 어떻더니 이명한(1595∼1645) 사랑이 어떻더니 둥글더냐 모나더냐 길더냐 짜르더냐 발이더냐 자이더냐 하 그리 긴 줄은 모르되 끝 간 데를 몰라라 - 병와가곡집 변하지 않는 가치 조선의 사대부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이 사랑의 모양에 대해 묻고 있다. 둥글더냐? 모가 나더냐? 길더냐? 짧더냐? 몇 발이더냐? 몇 자더냐? 그에 대한 대답. 그렇게 긴 줄은 모르겠는데 끝 간 데를 모르겠다고 한다. 이토록 재치 있는 사랑의 시를 남긴 이명한의 벼슬길은 화려했다. 그러나 광해군 때 서모 인목대비를 폐하는데 불참해 파직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항전을 주장해 청나라 심양까지 끌려가 사경을 헤매기도 한 강골이었다. 경기도 가..

(65) 권농가

(65) 권농가 중앙일보 입력 2021.04.01 00:16 유자효 시인 권농가 남구만(1629∼1711)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 청구영언 농지는 농민이 가져야 한다 봄이다. 해가 점차 일찍 뜨고 종달새가 운다. 농사일이 시작되는 계절, 소 여물을 먹여야 할 머슴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느냐. 고개 너머 긴 이랑 밭을 언제 갈려고 그러느냐. 조선 숙종 때 소론의 영수였던 약천 남구만이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반대하다가 강원도 망상으로 유배되었다. 동해시 망상동 신곡 약천 마을에는 ‘재 넘어와 사래 긴 밭’의 지명이 있고 남구만이 이곳에서 이 시조를 지었다는 비석이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나..

(64) 불면의 좋은 시간

(64) 불면의 좋은 시간 중앙일보 입력 2021.03.25 00:16 유자효 시인 불면의 좋은 시간 구중서(1936∼ ) 잠 아니 오는 밤을 반기면 어떠하리 마음과 말을 엮어 시를 쓰면 되리라 모처럼 고요한 때를 알뜰히 거두겠네 새벽에 일찍 깨면 머릿속이 맑아라 생광스레 생각난 말 다듬고 가려내어 머리맡 엷은 불 켜고 엎드려 적으리라 - 우리시대현대시조선101/150 ‘모자라듯’ 코로나 상황에 적응하는 모습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자려고 애를 쓸수록 잠은 더욱 멀리 달아난다. 하얗게 밤을 새우고는 낮에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인은 잠 안 오는 밤을 오히려 반긴다. 모처럼 조용한 때를 만났으니 시를 쓰겠다는 것이다. 머리맡에 엷은 불을 켜고 엎드려 그 시간을 보람 있게 ..

(63)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63)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중앙일보 입력 2021.03.18 00:17 유자효 시인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조식 (1501∼1572)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 병와가곡집 단성소(丹城疏)의 의기(義氣) 나의 생애는 추운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바위 굴에서 눈비를 맞았다. 구름 낀 볕 한쪽도 쬔 적이 없는데 서산에 해진다 하니 눈물이 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중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읊은 시조다. 경상도 합천 출신의 남명은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목격하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평생 벼슬을 거절하고 자유로운 몸으로 현실에 날 선 비판을 ..

(62) 25시

(62) 25시 중앙일보 입력 2021.03.11 00:07 유자효 시인 25시 조정제(1939∼ ) 코로나 지옥이다 구치소에 갇혀 있다 화살 같던 시간이 죽치고 앉아 있다 시간아 너라도 나다니며 물어오게 봄소식 - 시조집 ‘파도 소리’(2021. 동경) 코로나 블루에 신경 써야 할 때 ‘25시’는 루마니아 출신 작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의 소설 제목이다. 작가는 말한다. “마지막 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 인류의 모든 구제가 끝난 시간.” 시인은 말한다. 지옥이라고. 구치소에 갇혀 있는 수인(囚人)과도 같다고. 살처럼 빨리 날아가던 시간이 죽치고 앉아 있으니 나 대신 시간 너라도 나다니며 봄소식을 물어와 달라고 한다. 시인은 이런 상황을 한계 상황으로 보고, 불안과 절망의 시간으로 규정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