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61)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61)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중앙일보 입력 2021.03.04 00:07 유자효 시인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황(1501∼1570) 제11곡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 도산육곡판본(陶山六曲板本) 정치의 기반은 철학 조선 유학의 대종(大宗)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동에 돌아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63세 때 지은 연시조 12수 가운데 열한 번째 작품이다.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저 물같이 그치는 일 없이 저 산처럼 언제나 푸르게 살겠다는 학문 도야와 수양의 의지..

(60) 봄의 의미·2

(60) 봄의 의미·2 중앙일보 입력 2021.02.25 00:14 유자효 시인 봄의 의미·2 박영교(1943∼) 아픔에 더욱 아픔에 가슴을 찢고 있네. 슬픔에 더욱 슬픔에 가슴은 젖고 있네. 겨울밤 잔 가지들 울음 온몸 다 앓고 있네. - 우리시대현대시조100인선 86 징(鉦) 겨울이 아무리 혹독해도 봄은 온다 아프다. 더욱 아프다. 가슴이 찢어진다. 슬프다. 더욱 슬프다. 가슴이 젖는다. 겨울밤 잔가지들도 그렇게 아픈가. 온몸을 앓으며 운다. 이 겨울, 우리는 너무나 아팠다. 코로나19의 창궐은 그칠 줄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병마와 싸우고 죽어가고 있다. 가족들도 외면되는 죽음과 장례. 나은 사람들도 낙인이 두려워 몸을 숨긴다. 요양병원에 고립된 환자와 간병인들. 병원 앞에서 발을 구르다 돌아서는 ..

(59) 옥이 흙에 묻혀

(59) 옥이 흙에 묻혀 중앙일보 입력 2021.02.18 00:07 유자효 시인 옥이 흙에 묻혀 윤두서(1668∼1715) 옥이 흙에 묻혀 길가에 밟히이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병와가곡집 옥석을 가려야 한다 옥이 흙에 묻혀 길가에 버려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흙인 줄 알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행인들 발길에 흙과 함께 밟히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이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가 나타날 때까지 흙인 듯이 있거라.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다. 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산수·인물·초충·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특히 인물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58) 비는 마음

(58) 비는 마음 중앙일보 입력 2021.02.11 00:32 유자효 시인 비는 마음 서정주(1915∼2000) 버려진 곳 흙담 쌓고 아궁이도 손보고 동으로 창을 내서 아침 햇빛 오게 하고 우리도 그 빛 사이를 새눈 뜨고 섰나니 해여 해여 머슴 갔다 겨우 풀려 오는 해여 5만원쯤 새경 받아 손에 들고 오는 해여 우리들 차마 못 본 곳 그대 살펴 일르소 -현대시조 창간호(1970.7) 설날 평화가 깃들기를 이 시조는 ‘현대시조’가 창간 축시를 미당 서정주 시인께 받아 실은 것이다. 시조 전문지를 새로 내니 그동안 버려진 곳은 흙담을 쌓고 아궁이도 손을 보고 동으로 창을 내서 아침 햇빛도 오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그 빛 사이에 새눈을 뜨고 서겠다는 것이다. 이 시조의 절창은 둘째 수다. 우리가 ..

(57)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인들

(57)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인들 중앙일보 입력 2021.02.04 00:07 유자효 시인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인들 이원익(1547∼1634) 녹양이 천만사인들 가는 춘풍(春風) 잡아매며 탐화봉접(探花蜂蝶)인들 지는 꽃을 어이하리 아무리 사랑이 중한들 가는 님을 잡으랴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위대한 반대 푸른 버들이 천만 올 실이라 해도 가는 봄바람을 매어둘 수 있겠는가? 꽃을 탐하는 벌과 나비라 해도 지는 꽃을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사랑이 깊다고 해도 가는 님을 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흐르는 시간은 간절한 손길들이 아무리 많아도 막지 못하며, 벌과 나비가 아무리 원해도 지는 꽃은 어쩔 수 없다. 사람의 사랑도 그와 같아서 돌아선 님의 마음은 잡을 길 없다. 1597년 2월, ..

(56) 내 하늘 -데생·7

(56) 내 하늘 -데생·7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내 하늘 -데생·7 류제하(1940∼1991) 군데군데 흩어진 내 소망을 거느리고 차마 빈 가슴으론 너무 높은 파도소리 바다가 햇살을 열면 살아나는 내 하늘 -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35 ‘변조(變調)’ 조각난 마음들을 모아야 한다 나의 소망은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조각난 소망을 수습해 거느리고 파도 앞에 선다. 내 빈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엔 파도 소리가 너무나 높다. 그러나 바다가 햇살을 열면 나의 하늘이 살아날 것이다. 2021년을 우리는 조각난 가슴들로 맞았다. 어쩌다 이렇게 갈갈이 찢어졌는가? 역병으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고 사람들이 쓰러져가는데 국론은 모아지질 않는다. 민생의 어려움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이 상태에서 맞는 선거의..

(55) 권주가(勸酒歌)

(55) 권주가(勸酒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권주가(勸酒歌) 소춘풍(1467∼?) 당우(唐虞)를 어제 본 듯 한당송(漢唐宋) 오늘 본 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하는 명철사(明哲士)를 어떻다고 제 설데 역력히 모르는 무부(武夫)를 어이 좇으리 - 해동가요 작은 나라가 사는 법 조선 성종이 문무백관에게 연회를 베풀면서 기생 소춘풍에게 술잔을 돌리게 했다. 무관 출신의 병조판서가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예조판서 앞에 앉은 것을 보고 예판에게 먼저 잔을 권하며 한 노래(唱)다. 태평성세에 고금의 사리에 통달한 문신을 두고 어찌 제 자리도 모르는 무인을 따르겠느냐고 한다. 병판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그에게 잔을 권하며 한 노래. “전언(前言)은 희지이(戱之耳)라 내 말씀 허물마오/문무일체(文武一體)인줄..

(54) 눈 온 뒷날

(54) 눈 온 뒷날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눈 온 뒷날 최중태(1948∼ ) 면도날만큼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 본다. 떠나버린 사람의 인정이 북극 바람보다 찬데 사랑이 빙판이 된 땅 위로 노랗게 핀 복수초. -순례하는 물 (2009. 새로운사람들) 절망의 끝에 희망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흰 눈이 덮여 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을 도시에서 보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맞는 겨울다운 겨울이다. 얼마나 추웠으면 면도날만큼 창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을까? 북극 바람이 매섭지만 그보다 더 찬 것은 떠나버린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빙판 위로 노랗게 복수초꽃이 피고 있는 게 아닌가? 복수초는 겨울 얼음을 뚫고 꽃을 피운다. 1년 중 가장 먼저 피..

(53) 개세가(慨世歌)

(53) 개세가(慨世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개세가(慨世歌) 이색(1328∼1396)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예전에 대중목욕탕 건물이었다고 한다. - 청구영언 오늘도 우리는 갈 곳을 모른다 흰 눈이 내리기를 그친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다. 봄의 전령사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한다. 백설과 구름, 매화를 찾아 붉게 물든 노을 앞에 서 있는 선비. 한 폭의 그림 같은 대춘(待春)의 시다. 그러나 이색이 활동하던 시기를 생각하면 이 시조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구름’은 역성(易姓)혁명을 하려는 신흥 세력을, ‘매화’는 고려를 지키려는 우국지사로 치환하면 역사적 전환기에 직면한 지식인..

(52) 섣달 그믐밤

(52) 섣달 그믐밤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섣달 그믐밤 최순향(1946∼) 탁본 떠서 벽에 걸듯 지난 세월 펼쳐 보다 남루가 부끄러워 두 눈을 감는다 하나님, 당신만 아소서 아니 당신만 모르소서 - 행복한 저녁 환난 속에 한 해를 보내며 아쉬워도 후회스러워도 보내야만 하는 한 해. 지난 1년을 탁본 떠서 벽에 걸 듯 펼쳐 본다. 마치 저승에 가면 나의 생애가 비친다는 명경대(明鏡臺)처럼… 살아온 세월이 부끄러워 아예 눈을 감는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 ‘당신만 아소서’라고 했다가 이내 ‘당신만 모르소서’라고 하는 말이 귀엽고도 재미있다. 보여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부끄러움을… 망설임 속에서 기어이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밤을 맞는다. 우리 생애 처음으로 겪었던 팬데믹. 새해도 한참을 코로나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