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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아침형 인간

[이규태코너] 아침형 인간 조선일보 입력 2004.01.10 18:15 옛 선비사회에「사재(思齋)처럼 먹고 괴애(乖崖)처럼 자라」는 신조가 있었다. 중종 때 선비 사재 김정국(金正國)은 다섯 가지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고 말했었다. 한데 어느날 한 제자가 사재 밥상에 반찬이 세 가지만 올라 있는 것을 보고 왜 다섯 가지라고 거짓말하느냐고 물었다. 이에「자네 눈에는 두 가지 반찬이 보일 터문이 없지」하고 반드시 시장할 때 찾아먹으니 시장이 그 한 반찬이요, 반드시 따뜻하게 해서 먹으니 그것이 다른 한 반찬이라 했다. 괴애는 세조 때 학자 김수온(金守溫)이다. 옛글을 많이 외우기로 괴애 위에 난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기억력이 좋은 분이다. 책을 구하면 낱장을 찢어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며 마상(馬上) 측상(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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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부처간 인력교류

[이규태코너] 부처간 인력교류 조선일보 입력 2004.01.09 17:57 행동학자 데스먼드 모리스의 「벌거숭이 원숭이」는 인간 행동에 스며 있는 원숭이의 생태를 가려낸 명저다. 그에 따르면 원숭이 사회는 순위(順位)와 서열을 지키는 종적(縱的)사회로 한 마리 수놈이 한 무리를 지배하면 차순위 차차순위의 원숭이가 그에 따르는데, 차순위의 원숭이 털이 윤기가 더하고 성적 매력이 더하거나 목덜미에 이전에 없던 긴 털이 나면 보스 원숭이가 병들었거나 노약해져 지배권을 바꿀 시기가 임박했음을 그로써 안다 했다. 곧 원숭이뿐 아니라 짐승의 집단생활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데 종적 서열구조가 필수요 그 보스가 바뀔 즈음에 종적인 차순위자에게 생리적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은 서열파괴가 일어나거나 외부에서 횡적(橫的)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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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지문 파동

[이규태코너] 지문 파동 조선일보 입력 2004.01.08 16:36 미국은 테러 예방책으로 올 들어 입국하는 외국인에게 선별적인 지문 채취를 하고 있다. 지문 채취는 범죄 전과를 조회하거나 예비 범죄자에게 강요되는 감식 수단으로 인격 모독과 인권 침해라 하여 거부돼온 필요악이다. 서구국가들은 면제한 데 대한 차별감정이 상승하여 갈등이 진폭되고, 브라질 등 일부 국가들에서는 자국에 입국하는 미국인에 한해 지문을 채취하는 감정적 대응을 하고 있어 감정싸움으로 확대될 조짐이다. 서양에서 지문을 범죄수사에 활용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로 런던의 경찰 총감 헨리가 처음이요, 그 헨리의 지문법이 수사기법으로 온 세계에 번져나가 오늘에 이른것이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신이 그 사람의 동일인임을 증명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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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칠지도(七支刀)

[이규태코너] 칠지도(七支刀) 조선일보 입력 2004.01.07 16:32 한·일 간 역사의 쟁점이 돼 내린 일본의 국보 칠지도(七支刀)가 10년 만에 공개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길이 75㎝의 양날 도검으로 좌우에 세 개씩의 가지가 돋아 있는 신통력을 부르는 주술의 신검(神劒)이다. 이 칼은 일본 나라(奈良) 이시가미(石上)신궁의 신체(神體)로 이를 모신 성역에 금줄을 쳐놓고 접근만 하려 해도 신발을 벗게 하는 등 일본에서 이를 본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소중히 여겨온 귀물이다. 이 칠지도의 도신(刀身)에는 금박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워낙 오래되어 해독할 수 없는 글자가 있고 또 글자를 조작한 흔적도 완연하여 백제와 일본 간의 역사 해석에 문제를 제기해온 백제 신검이다. 탈락문자가 있는 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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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원일한

[이규태코너] 원일한 조선일보 입력 2004.01.18 19:19 우리나라에 건너온 최초의 신교 선교사요, 연세대를 세운 언더우드(元杜尤)의 손자이며,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했고 정전협정의 산 증인이기도 한 언더우드 3세 원일한(元一漢) 박사가 작고 했다. 고종황제가 사석에서‘형’이라고 불렀을 만큼 신뢰했다던 언더우드 1세가 미국에서 숨을 거둘 때 부인에게“거기를 가야 한다”고 되풀이하면서 거기가 어디인지를 말 못하고 눈을 감았다. 미국 선영에 묻혔던 그의 유해를 유언대로 한국을 뜻하는‘거기에?’모셔와 묻었고, 박사의 아버지인 언더우드 2세와 어머니, 아내가‘거기에?’묻혔듯이 그도 바로 거기 가족 곁에 묻힐 것이다. 언더우드의 머리 발음인‘언’이‘원’과 흡사하다 하여 원씨로 한국성을 삼았더니 원주 원씨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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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조어도와 독도

조선일보 | 오피니언 [이규태코너] 조어도와 독도 입력 2004.01.19 16:16:40 | 수정 2004.01.19 16:16:40 독도 우표 발행으로 영유권을 두고 한·일 간에 분쟁이 격앙되고 있는 작금, 동남중국해 조어도의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일본의 선박 간에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바다의 양국 접경에 있는 독도와 조어도를 둔 분쟁의 씨앗은 공통된 데가 있다. 독도의 경우 일본이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단순하다. 무인도인 독도에 와서 가재(물개)잡이를 하던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의 어부 나카이(中井養三郞)가 이 섬의 일본영토 편입원을 일본 정부에 내고 자기에게 이 섬을 대부해달라고 청원했고, 이에 역사적 지리적 국제적 확인 없이 을사조약이 맺어지던 1905년에 저희 각의(閣議)에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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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용산 기지

[이규태코너] 용산 기지 조선일보 입력 2004.01.20 16:23 「한양가(漢陽歌)」에서 서울의 산세를 “북악산이 서방이요 남산이 각시인데 서방이 각시를 두 팔로 크게 끌어안고 있는 형국”이라 했다. 그 오른팔이 인왕산 무악 만리현 둔지산으로 뻗어 한강에 스러지는데 스러지기 직전에 용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하여 ‘용두봉(龍頭峰)’ 또는 ‘용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했다. 이 일대의 경관이 빼어났던지 고려 때에는 임금의 휴양지로 몽골식 파오(包)를 짓고 머물곤 했던 명승지였다. 고려 충숙왕(忠肅王)은 만삭이 된 조국공주(曹國公主)와 더불어 이 둔덕에 파오를 치고 석 달간이나 머물렀다. 그동안에 공주는 왕자를 낳았고 산모는 산욕열(産褥熱)로 그곳에서 죽었다. 고려 때 시인 이인로(李仁老)는 “늙어서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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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장모의 力學

[이규태코너] 장모의 力學 조선일보 입력 2004.01.24 17:17 | 수정 2004.01.25 14:17 미국에는 장모의 날이 있다. 어머니가 베푸는 은공을 보답받지 못할 때 어머니날이 생기고 어린이가 건전하게 대접받지 못할 때 어린이날이 생기듯, 미국에서는 장모와 사위 사이가 험하기 이를데 없어 그 관계 개선을 위해 장모의 날이 생겨났을 것이다. 영화 ‘에어포트 75’에 보면 자가용 제트기를 손수 모는 젊은 실업가 앤드루스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마다 ‘장모로부터 해방이다!’라고 뇌까리던 것이 생각난다. 이처럼 기혼 미국 남자들은 어느 정도는 장모 콤플렉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한국 며느리들이 시어머니 콤플렉스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사위가 곰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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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독일병

[이규태코너] 독일병 조선일보 입력 2004.01.25 17:22 복지의 과보호로 의욕을 잃고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을 「폼푸리포사」라고 한다. 80년대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동명 풍자동화의 작가요,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폼푸리포사는 복지서비스를 받고 걱정없이 사는데 서비스가 확대될수록 세금이 무거워져 작품 수입의 절반이 세금으로 나가자 글 쓸 의욕을 잃고 붓을 꺾었다. 장례비로 아껴둔 돈마저 세금으로 빼앗기자 분개한 폼푸리포사는 푼돈 털어 쇠망치 하나 사들고 장례비 탈환하러 국고를 찾아간다는 줄거리로 복지선진국인 북구병(北歐病)을 풍자해서 유명하다. 영국에서 과복지 고비용으로 담세율이 수입의 50%를 넘은 것은 70년대요, 누진제로 80%까지 뜯기자 발전이며 근로의욕이 추락해 생산성은 급락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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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몽골기병

[이규태코너] 몽골기병 조선일보 입력 2004.01.26 16:15 한말 프랑스 동양함대의 침입을 겪은 흥선대원군은 이에 대결하기 위한 고심 끝에 팔도의 무당과 광대들을 특수부대로 만들어 주력부대에 배치했다. 무(巫)자 깃발 아래 결집된 이를 무부군(巫夫軍)이라 했으며 1900년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었다. 민속학자 이능화는 어릴 적 괴산에서 한말 군대행진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 붉은 옷을 입은 무부군이 나팔불고 춤추며 행렬을 전도(前導)하더라고 했다. 무당에게 특출난 싸움의 재간이 있을 리 없는데 특수부대를 삼은 것은 전투에 사기를 앙양시키기 위한 신바람 작풍부대였을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신명과 접하면 물불 가리지 않는 의식이 잠재돼 있어 무당으로 하여금 신명을 유발시켜 전력을 강화하려 함이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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