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994

[이규태코너] 새 서울역

[이규태코너] 새 서울역 조선일보 입력 2003.12.21 18:41 근 80년 동안 수도의 얼굴이었던 서울역이 중세풍에서 현대풍으로 얼굴을 정형했다. 붉은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르네상스식 서울역이 고속철도의 역을 겸하는 통합 새 역사로 그 현관을 양보한 것이다. 새 서울역에는 3500평의 백화점이, 구 역사에는 할인점이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서울역이 문을 열었을 때는 이름도 남대문역으로 초라한 목조였으며, 100여년 동안 폭주하는 철도 수요에도 그 좁은 부지에서 늘리지도 않고 잘도 버텨 온 서울역이다. 한말 한성판윤인 이채연(李采淵)이 남대문 다락 위에서 서울역사의 터로 11만평을 대여한다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내붙인 방을 보면 이렇다.「숭례문에서 청파(靑坡)다리까지 남관묘(南關廟)에서 만리동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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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내 자식 죽이기

[이규태코너] 내 자식 죽이기 조선일보 입력 2003.12.22 15:58 카드 빚에서 헤어나지 못한 20대 아비가 두 아들딸을 한강에 차례로 던져 죽였다. 인륜(人倫)을 잇는 쇠동아줄 같았던 끄나풀이 거미줄처럼 가늘어지더니 이제 그마저 끊어지는 소리를 듣는 것 같다. 10여년 전 ‘타임’지에 미국의 달라지는 가족상을 둔 얀케로비치 교수의 조사결과가 소개되었는데, 미국 부모들의 43%가 권위보다 자유를, 성공보다 자기충족을, 물질적 풍요보다 심신적 안일을 추구하는 뉴 브리드족으로 분류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자유와 자기충족 자기안일을 가장 가까이서 구속하는 아이들의 방임이 빠를수록 좋다고 하여 아이들이 슬하에서 떠나가는 연령이 종전의 17~18세에서 급격히 하강하고 있다고 했다. 그 교수는 아프리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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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대동강의 푸에블로

[이규태코너] 대동강의 푸에블로 조선일보 입력 2003.12.23 16:53 1968년 동해상에서 북한군에 나포됐던 미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평양 대동강변에 예인되어 전시 중이라는 사진보도가 있었다. 당시 83명의 승무원들은 북한에 수용되었다가 버처 선장의 영해 침범 시인으로 근 1년 만에 풀려났는데 선원들의 생명을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한다. 선체만은 동해 원산항에 예인되어 있었는데 그 푸에블로호를 공해상으로 멀리 돌아 예인했는지 해체해서 육로로 옮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서해안으로 대동강 타고 평양까지 옮겨다 놓은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반미의식을 고조시킬 정치적인 필요가 커지자 이를 대동강변에 옮겨 구경시킴으로써 반미에서 극미(克美)로 여론을 드높이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극미 여론을 증폭시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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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성탄옹과 조왕님

[이규태코너] 성탄옹과 조왕님 조선일보 입력 2003.12.24 16:28 「기자님 나는 여덟 살입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꼭 가르쳐주십시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정말로 있는 것입니까.」 버지니아라는 소녀가 미국의 뉴욕 선 신문사에 한 투서 내용으로 100여년 전 일이다. 너무 흔한 질문이요, 묵살해 버림 직한 이 소박한 질문에 이 신문은 애정이 담긴 사설로 응답을 했다. 「산타클로스가 오신다는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있고 남을 위한 배려가 있으며 서로가 믿고 살 수 있는 한 산타클로스는 분명히 있는 것이다」 했다. 이 글을 쓴 기자는 죽은 지 오래지만 이 사설은 고전이 되어 지금도 곧잘 회자되고 있다. 물질문명 합리주의의 풍조가 만연했던 당시 사회의 반동으로 이 회답은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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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어원으로 본 고구려

[이규태코너] 어원으로 본 고구려 조선일보 입력 2003.12.25 15:34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 절도의 부당성을 고구려의 어원으로 드러내 보고자 한다. 지금 온 세계에서 한국을 코리아라 부른다. 프랑스 어권에서 Corea, 영어권에서 Korea로 머리글자가 다를 뿐 그 뿌리와는 무관하다.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고구려의 나라이름을 따라 국호를 삼았고, 코리아는 고려를 로마자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곧 코리아의 뿌리가 고구려요, 만약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면 코리아는 중국의 일부로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 되니 국가 존망의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고구려라는 이름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한서(漢書)’ 지리지로 고구려현(高句驪縣)으로 나온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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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영상세대와 글짓기

[이규태코너] 영상세대와 글짓기 조선일보 입력 2003.12.26 16:51 아기들은 기어다니는 것으로 가고자 하는 곳을 찾아간다. 이는 인생을 사는 가장 중요한 기초 학습이다. 한데 요즈음 기지 않고 바로 서는 아기가 많아지는 것을 두고 미국에서 문제삼은 일이 있었다. 방마다 있는 텔레비전 세트를 붙들고 서기 때문이며 기어다닐 필요없이 그 한 곳에서 모든 것을 습득한다. 이렇게 인생에서 기는 과정을 생략하고 자란 아이들은 주어지는 것만 받아들일 뿐 찾아가 추구하는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책을 통한 활자와 등지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 영상으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며 자란 세대의 특성이다. 부어스틴의「이미지」에 보면 영상세대가 터득한 지식의 99%가 텔레비전을 통해 얻은 의사체험(擬似體驗)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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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빈대 비상

[이규태코너] 빈대 비상 조선일보 입력 2003.12.28 15:05 미국은 지금 테러 비상, 광우병 비상, 그리고 빈대 비상ㅡ3대 비상에 휘청거리고 있다. 미국 전역 28개 주에 빈대가 50년 만에 나타나 서민 아파트부터 최고급 호텔까지 그 출현으로 비상이 걸리고 방역회사들이 폭주하는 수요를 감당 못해 아우성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빈대는 파리 모기 이 벼룩과 함께 5대 해충으로 역사와 더불어 사람을 괴롭혀 오다가 살충제인 DDT의 출현으로 잠적했다가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그 약제가 사라진 지 50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기원전 3세기의 그리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속에서 술의 신인 바쿠스가 빈대에게 시달리는 대목이 나오고, 소크라테스가 침대를 쓰지 않아 유명한데 그 이유는 빈대 때문이었다.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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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꽃미남

[이규태코너] 꽃미남 조선일보 입력 2003.12.29 16:29 차이가 엄연했던 남녀가 할 일의 한계를 허무는 것으로 진행된 현대화다. 그래서 색다른 볼거리가 첩첩인데 여자권투의 챔피언 경기도 그러하려니와 라운드걸 대신 한국 최초로 등장한 라운드맨인 ‘꽃미남’도 볼거리였다. 근육질을 과시하기도 하고 성감을 유발하는 옷차림이며 선글라스에 보디가드 패션 등으로 여성팬들을 매혹시켰다 한다. 꽃미남의 등장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해프닝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출현을 더듬어보는 것도 무위하지 않을 것 같다. 옛날 농촌에 숫총각으로 불리우는 잘생기고 건장한 꽃미남이 있었다. 정월 대보름날 나경(裸耕)이라는 풍년기원 행사가 있었는데 이 숫총각을 벌거벗겨 짚으로 만든 소를 몰아 논밭을 갈게 하고, 곱게 단장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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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전등 나무

[이규태코너] 전등 나무 조선일보 입력 2003.12.30 17:39 연말만 되면 서울의 도심과 유흥업소의 앞 가로수들은 미니전등으로 휘황찬란한 전등나무로 탈바꿈한다. 활엽수건 낙엽수건 아랑곳없이 보석을 뿌려놓은 듯 전기옷을 입히는데, 그로써 나무들이 고통받거나 생육에 지장받지 않을 수가 없다. 프랑스 과학자로 동시대의 볼테르가 존경했던 메랑이 서재에서 기르는 콩과의 미모사가 황혼으로 빛이 약해지면서 잎이 안쪽으로 오므라드는 것을 보고 식물도 잠을 잔다는 학설을 발표했었다. 그 2세기 반 후 미국 플로리다 환경위생연구소의 존 오토 박사는 정오에 미모사 여섯 그루를 들고 광산 엘리베이터를 타고 1950m 지하로 내려갔더니 여섯 그루 모두 잎을 안으로 닫았던 것이다. 식물의 생존에는 빛만이 아닌 어느 만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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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해맞이와 한국인

[이규태코너] 해맞이와 한국인 조선일보 입력 2003.12.31 17:44 바다에 지는 해를 보면서 워즈워스는 자신의 육체를 떠난 마음이 무한공간에 빠져들어 영원과 접속하는 굉음을 듣는다고 읊었다. 이처럼 지는 해를 읊은 영시는 많지만 뜨는 해를 읊은 영시는 희귀하다. 셰익스피어는 맥베스로 하여금 아침의 붉은 노을은 「뱃사공에게는 난파를, 들판에는 푹풍우를, 양치기에게는 슬픔을ㅡ」 예고한다고 읊었다. 우리나라 노랫말에는 뜨는 해가 잦은데 미국 노랫말에는 지는 해가 월등하게 잦다. 스위스 알프스 리기산장에 관광열차가 해질 무렵에 도착하게 짜여진 이유도 서양사람들의 지는 해 선호에 영합하기 위함이었다. 열차에서 쏟아져 나온 관강객이 두 패로 갈라져 가는데, 주류는 지는 해를 구경하려는 서양사람들이고 소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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