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274] 창연체하(愴然涕下)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현제명 선생 작사 작곡 '고향 생각'의 1절 가사다. 저물어도 마실 오는 친구 하나 없다. 초저녁부터 허공의 흰 달을 올려다보니 외로움이 바다 같다. 타지의 초라한 거처에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 막막한 생계 걱정과 앞날 근심만 하염없다. 늦은 밤 연구실을 나와 환한 달빛을 보며 걷다가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두운 길 위로 그 처연했을 심사가 엄습해와 툇마루에 나와 앉아 하늘 보며 흘리던 그 눈물을 떠올렸다. 인터넷이나 전화가 없던 그 시절에는 그리움도 막막함도 지금과는 농도가 애초에 달랐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

[정민의 世說新語] [273] 송무백열(松茂柏悅)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백열록(柏悅錄)'이란 책이 있다. 근세 금명(錦溟) 보정(寶鼎·1861~1930) 스님이 대둔사에 머물면서 본 귀한 글을 필사해 묶은 것이다. 모두 74쪽 분량에 다산의 글만 해도 '산거잡영(山居雜詠)' 24수와 '선문답(禪問答)', 그 밖에 승려들에게 준 제문과 게송 등 모두 10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 문집에 빠지고 없는 글이다. 초의의 '동다송(東茶頌)'도 수록되었다. 책 제목인 '백열(柏悅)'의 뜻이 퍽 궁금했다. 찾아보니 육기(陸機·260~ 303)가 '탄서부(歎逝賦)'에서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매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타자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 한 데서 따온 말이었다. 송무백열(松茂柏悅)은 뜻을 같이하는 벗..

[정민의 世說新語] [272] 요생행면(僥生倖免)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박제가의 처남 이몽직(李夢直)은 충무공의 후예였다. 하루는 남산에 활을 쏘러 갔다가 잘못 날아든 화살에 맞아 절명했다. 박지원(朴趾源·1737 ~1805)은 '이몽직애사(李夢直哀辭)'에서 '대저 사람이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요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夫人一日之生, 可謂倖矣.)'고 썼다. 한 관상쟁이가 어느 여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쇠뿔에 받혀 죽을 상이요. 외양간 근처도 가지 마시오." 그 뒤 여자가 방안에서 귀이개로 귀지를 파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방문을 확 밀치는 통에 귀이개가 귀를 찔러 죽었다. 살펴보니 귀이개는 쇠뿔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같은 글에 나온다. 해괴하고 알 수 없는 일들이 아침저녁으로 일어난다. 정상 운항하던 여객기가 미사일에 격추되고, 하늘에서 강철 ..

[정민의 世說新語] [271] 장망록어 (張網?鹿魚)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아세아문화사에서 펴낸 '범어사지(梵魚寺誌)'를 읽는데 마지막 면에 인장이 한 과 찍혀 있고 옆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선생의 글이 적혀 있었다. 사연이 자못 흥미로웠다. 범어사 부근에 원효 스님의 유지(遺址)가 있었다. 1936년 이곳에 공사를 하면서 땅을 파다가 두 길 깊이에서 해묵은 옥인(玉印) 하나가 출토됐다. 본래 철합(鐵盒)에 넣었던 것인데 오랜 세월에 합은 다 삭고 옥인만 남은 상태였다. 인장에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크게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 인천(人天)의 물고기를 낚는다(張大敎網 漉人天之魚)." 가르침의 그물을 크게 펼쳐 미망(迷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모두 제도(濟度)하라는 뜻이다. 원효의 천년 성지 땅속 깊은 곳에서 쇠..

[정민의 世說新語] [270] 칠등팔갈(七藤八葛)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칠등팔갈(七藤八葛)은 다산이 즐겨 쓴 표현이다. 등넝쿨이 일곱인데 칡넝쿨은 여덟이다. 이 둘이 겹으로 칭칭 엉켰으니 어찌 풀 수 있겠는가? 뒤죽박죽 손댈 수 없는 갈등(葛藤)의 상태를 말한다. '악서고존(樂書孤存)'에서는 '꼬리는 머리를 돌아보지 못하고, 왼편은 오른편을 건너보지 못한다. 열 번 고꾸라지고 아홉 번 엎어지며, 일곱이 등넝쿨이면 여덟은 칡넝쿨인데도 근거 없는 말로 꾸미려든다(尾不顧首, 左不顧右, 十顚九踣, 七藤八葛, 以飾其無稽之言)'고 썼다. 칠등팔갈에 백관천결(百綰千結)을 붙여 쓰기도 했다. 백 번 얽어매고 천 번 묶었다는 말이다. '폐책(弊策)'에서는 이렇게 논파했다. "사물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는 것은 이치가 그렇다. 성인으로 성인을 잇게 해도 더하고 덜함..

[정민의 世說新語] [269] 토굴사관(土窟四關)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덕리(李德履·1728~?)는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진도에 유배 왔다. 불과 두 해 전 종2품 오위장(五衛將)의 신분으로 창경궁 수비의 총책임을 맡았던 그는 결국 진도 유배지에서 근 20년 가까운 유배 생활 끝에 비운의 생을 마친 듯하다. 그의 시문집 '강심(江心)'에 '실솔부(蟋蟀賦)', 즉 '귀뚜라미의 노래'란 작품이 있다. 그는 진도 통정리(桶井里)의 귀양지에서 거북 등처럼 갈라진 흙벽 틈에서 밤낮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 그 절망의 시간을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마음이 꺾이고 뜻이 무너지자 멍하니 식은 재 위에 오줌을 눈 것처럼 다시는 더운 기운이 없었다. 또 어찌 능히 귀뚜라미가 혼자 울다 혼자 그치면서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기는 것만 같겠는가?" 하지만 ..

[정민의 世說新語] [268] 황공대죄(惶恐待罪)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기(李塈·1522~1600)가 선조대 조정을 평가한 글을 읽었다. "편안히 즐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기강과 법을 하찮게 여긴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벌에 기준이 없다. 탐욕과 사치가 날로 성하고 가렴주구는 끝이 없다. 부역은 잦은 데다 힘이 들어 민심은 떠나가 흩어졌다. 어진 이와 사악한 이가 뒤섞여 등용되자 선비들은 두 마음을 품고, 관리들은 태만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할 마음을 먹지 않는다. 승정원은 임금 가까이에 있으면서 왕명을 출납함에 옳은 마음으로 보필할 생각은 않고 매번 '신의 죄를 벌해주소서'란 말만 일삼고, 비변사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관장하면서도 계획을 세울 적에 허물을 뒤집어쓰려는 사람은 없이 오로지 임금 뜻에 따르는 것만을 옳다고 여긴다. 도성 ..

[정민의 世說新語] [267] 위학삼요(爲學三要)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승려 초의(草衣)는 다산이 특별히 아꼈던 제자다. 다산은 처음에 그의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가 성에 차지 않았던 듯 수십 항목으로 적어준 증언에서 진취적인 학습 자세를 반복하여 강조했다. 이들 증언은 다산의 문집에는 모두 빠졌고 신헌(申櫶·1810~1884)이 초의에게 들렀다가 다산이 그에게 써준 증언(贈言)을 보고 베껴 둔 '금당기주(琴堂記珠)'란 기록 속에 남아 전한다. 다음은 그중 학문의 바탕을 갖추기 위해 지녀야 할 덕목을 말한 한 대목이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혜(慧)와 근(勤)과 적(寂) 세 가지를 갖추어야만 성취함이 있다.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한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가 없다. 고요하지 않으면 오로지 정밀하게 하지 못한다. 이 세 가지가..

[정민의 世說新語] [260] 임진마창(臨陣磨槍)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홍루몽'에 '적진과 마주해 창을 갈아 봤자 아무 쓸데가 없다(臨陣磨槍, 也不中用)'는 말이 나온다. 평소에 빈둥대며 놀다가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되려는 참에 "잠깐, 창날 좀 갈고 싸우자!"고 외치는 꼴이란 말이다. 200년 전 다산은 '군기론(軍器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각 고을에 보관된 군기(軍器)는 활을 들면 좀먹은 부스러기가 우수수 쏟아지고, 화살을 들면 깃촉이 쑥쑥 빠진다. 칼을 뽑으면 날은 칼집에 꽂힌 채 칼자루만 쑥 뽑힌다. 총을 보면 녹이 슬어 총구가 아예 막혀 있다. 하루아침에 환난이 있게 되면 온 나라가 모두 맨손인 셈이다.' 고을살이를 나가 무기고를 점검해보니 말할 수 없이 한심했다. 활은 좀을 먹어 시위를 당기자 줄이 툭 끊어지고 화살은 그저 들..

[정민의 世說新語] [259] 유생개곡(有生皆哭)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임진왜란이 끝난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4월 15일 아침 느닷없이 천지를 진동하는 곡성에 휩싸였다. 깜짝 놀라 늙은 아전을 불러 영문을 묻자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임진년 당시 왜적이 몰려와 이날 동래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살려고 성안으로 몰려든 백성들이 몰살을 당했습지요. 그래서 이날만 되면 살아남은 백성들이 집마다 상을 차려 죽은 이를 제사 지낸답니다." 이안눌은 이 일을 '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이란 장시에 담아 기록으로 남겼다. 다음은 아전의 설명 대목 중 한 부분이다. "'아비가 제 자식 곡을 하고요, 아들이 제 아비 곡을 하지요. 할아비가 손자 곡을 하고요, 손자가 할아비의 곡을 합니다. 어미가 제 딸을 곡하기도 하고, 딸이 제 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