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306] 취로적낭 (就艫摘囊)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겨울철 장사치의 배가 강진 월고만(月姑灣)을 건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회오리바람에 배가 그만 뒤집혔다. 뱃전에 서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지자 뱃고물에 앉아 있던 자가 잽싸게 달려가더니 물에 빠진 사람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 속에 돈이 두 꿰미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돈주머니를 챙겼을 때 그 자신도 이미 물에 휩쓸리고 있었다. 결국 둘 다 빠져 죽었다. 이 얘기를 들은 다산이 말했다. "아! 천하에 뱃전으로 달려가 주머니를 낚아채지(就艫摘囊) 않을 사람이 드물다. 이 세상은 물 새는 배다. 약육강식이라지만 강한 놈과 약한 놈이 함께 죽고, 백성의 재물을 부호가 강탈해도 백성과 부호는 똑같이 죽고 만다." 다산이 초의에게 준 증언첩(贈言帖)에 나온다. 이덕무가 삼포(三浦)에 살 때..

[정민의 世說新語] [303] 생사요법 (省事要法)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해도 해도 일은 끝없고 가도 가도 길은 멀다. 속도만 숨 가쁘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불안해서 더 하고 그럴수록 더 불안하다. 한 가지 일을 마치면 다른 일이 줄지어 밀려온다. 인생에 편한 날은 없을 것만 같다. 산적한 일 앞에 비명만 질러대느니 일을 덜어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처방이 절실하다. 홍길주(洪吉周·1786~1841)가 '수여연필(睡餘演筆)'에서 말했다. "일 중에 오늘 해도 되고 열흘 뒤에 해도 되는 것이 있다면 오늘 즉시 해치운다. 오늘 해도 괜찮고 1년이나 반년 뒤에 해도 괜찮은 것이라면 한쪽으로 치워둔다. 이것이 일을 더는 중요한 방법(省事要法)이다." 욕심 사납게 다 붙들지 말고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의 교통정리만 잘해도 일이 확 준다. 꽉 막혀 답답..

[정민의 世說新語] [302] 석체소옹(釋滯消壅)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옛 사람은 차의 여러 효능만큼이나 그 강한 성질을 경계했다. 당나라 때 기모경(棊母 )은 '다음서(茶飮序)'에서 "체한 것을 풀어주고 막힌 것을 없애주는[釋滯消壅] 것은 하루 잠깐의 이로움이고, 정기를 수척케 하고 기운을 소모시키는[瘠氣耗精] 것은 평생의 큰 해로움이다"라고 말했다. 소동파도 '구지필기(仇池筆記)' 중 차를 논한 대목에서 "번열을 없애고 기름기를 제거함[除煩去膩]은 차를 빼고는 안 된다. 하지만 은연중 사람을 손상시킴이 적지 않다"고 썼다. 당나라 때 재상을 지낸 이덕유(李德裕·787~849)는 차에 벽(癖)이 들었단 말을 들은 사람이었다. 한번은 촉(蜀) 땅에서 몽산(蒙山)의 떡차를 얻고는 이를 떼어 고깃국에 넣었다. 이튿날 보니 밤새 국 속의 고깃덩어리가 다..

[정민의 世說新語] [301] 궁하필위 (窮下必危)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동야필(東野畢)이 말을 잘 부리기로 소문났다. 노(魯)나라 정공(定公)이 안연(顔淵)에게 그에 대해 묻자 안연의 대답이 뜻밖에 시큰둥했다. "잘 몰기는 하지요. 하지만 그는 말을 곧 잃게 될 겁니다." 정공은 기분이 상해 측근에게 말했다. "군자가 남을 헐뜯다니!" 사흘 뒤 과연 말 기르는 사람이 정공에게 동야필의 말이 달아난 일을 전했다. 정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가서 안연을 데려오너라." 정공이 물었다. "그대 말을 믿지 않았는데 과연 그리되었소. 어찌 아셨소?" 안연의 대답은 담담했다. "정치를 보고 알았습니다. 예전 순(舜)임금은 백성을 잘 부렸고 조보(造父)는 말을 잘 부렸습니다. 백성과 말을 궁하게 하지도 않았지요. 이 때문에 순임금의 백성은 달아나지 ..

[정민의 世說新語] [299] 은산철벽 (銀山鐵壁)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은산(銀山)은 중국 베이징시 창핑구(昌平區)에 위치한 산 이름이다. 봉우리가 워낙 높고 험준한 데다 겨울이면 흰 눈에 늘 덮여 있어 이 이름을 얻었다. 기슭은 온통 검은 석벽으로 둘러싸여 이를 철벽이라 부른다. 그래서 은산철벽은 사람의 의지가 굳고 기상이 높아 범접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많이 쓴다. 권상하(權尙夏·1641~1721)가 정황(丁)의 신도비명에서 "대개 공은 실지 공부가 이미 깊어 대의를 환히 보았다. 이 때문에 변고를 만나서도 지조를 잃지 않았다. 비록 옛날에 이른바 은산철벽이라 한들 어찌 이에서 더하겠는가?"라고 썼다. 명(銘)에서도 "절해에 유배되어 죽음 앞에 더욱 굳세. 곤륜산에 불이 나도 안 타는 건 옥뿐일세(流移絶海, 九死確. 火炎崑岡, 不燼唯玉)"..

[정민의 世說新語] [298] 지영수겸 (持盈守謙)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빈천은 근검을 낳고, 근검은 부귀를 낳는다. 부귀는 교만과 사치를 낳고, 교만과 사치는 음란함을 낳으며, 음란함은 빈천을 낳는다. 여섯 가지 길이 쳇바퀴처럼 돈다(貧賤生勤儉, 勤儉生富貴, 富貴生驕奢, 驕奢生淫佚, 淫佚生貧賤. 六道輪回)." 청나라 진홍모(陳弘謀)가 엮은 '오종유규(五種遺規)'에 나오는 말이다. 빈천에서 근검으로 노력한 결과 부귀를 얻었다. 부귀를 얻고 눈에 뵈는 게 없어 교만과 사치를 일삼았다. 교만과 사치에 취해 방탕에 빠지니 잠깐만에 다시 빈천의 자리로 돌아와 있다. 한때의 부귀는 꿈이었고 앞뒤로 뼈저린 빈천만 남았다. 당나라 때 유빈(劉玭)이 자손에게 남긴 경계다. "훌륭한 가문은 조상의 충효와 근검에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고, 자손의 둔하고 경솔..

[정민의 世說新語] [297] 서소묵장(書巢墨莊)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송나라 때 육유(陸游)가 자기 서재를 서소(書巢), 즉 책둥지로 불렀다. 어떤 손님이 와서 물었다. "아니 멀쩡한 집에 살면서 둥지라니 웬 말입니까?" 육유가 대답했다. "당신이 내 방에 들어와 보지 못해서 그럴게요. 내 방에는 책이 책궤에 담겼거나 눈앞에 쌓였고 또 책상 위에 가득 얹혀 있어 온통 책뿐이라오. 내가 일상의 기거는 물론 아파 신음하거나 근심·한탄하는 속에서도 책과는 떨어져 본 적이 없소. 손님도 안 오고 처자는 아예 얼씬도 않지. 바깥에서 천둥 번개가 쳐도 모른다네. 간혹 일어나려면 어지러이 쌓인 책이 에워싸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소. 그러니 서소라 할밖에. 내 직접 보여드리리다." 손님을 끌고 서소로 가니 처음엔 들어갈 수가 없었고, 들어간 뒤에는 나올 수가..

[정민의 世說新語] [296] 용서성학 (傭書成學)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덕무(李德懋)가 이서구(李書九)에게 쓴 편지에 "옛날에 용서(傭書)로 책을 읽은 사람이 있다길래 내가 너무 부지런하다고 비웃은 적이 있었소. 이제 갑자기 내가 그 꼴이라 거의 눈이 침침하고 손에 굳은살이 박일 지경이구려. 아! 사람이 진실로 스스로를 요량하지 못하는 법이오"라고 쓴 것을 보았다. 이때 용서는 책을 빌려 읽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남을 위해 책을 베껴 써주는 것을 말한다. 용(傭)은 품팔이의 뜻이다. 이덕무가 이서구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그대가 내게 장서(藏書)를 맡겨 베껴 쓰고 교정 보고 평점까지 맡기려 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라고 쓴 것을 보면 그가 젊은 시절 용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갔던 딱한 형편이 짐작된다. 이런 내용도..

[정민의 世說新語] [295] 비극태래(否極泰來)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고려시대 문신·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1202년 개성 남쪽의 한갓진 동네로 이사했다. 깊숙이 들어앉은 마을은 맑고 깨끗해 산촌의 풍미가 있었다. 다만 동네 이름이 색동(塞洞)인 것만은 마음에 걸렸다. 색(塞)은 비색(否塞), 즉 꽉 막혀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동네 이름과 달리 이규보는 이 마을에 이사해 20년을 사는 동안 관운이 순조롭게 풀려 4품관 지위에까지 올랐다. 벼슬아치들이 이웃에 이사 오면서 마을의 분위기도 일신했다. 이규보는 이웃의 권유로 동네 이름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렇게 썼다. '대저 비(否)가 극도에 이르면 태(泰)가 되고, 색(塞)이 오래되면 통하게 된다. 이는 음양의 변치 않는 이치다. 동네가 장차 열리려 하니 내가 그 이름..

[정민의 世說新語] [294]고락상평 (苦樂常平)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시도 때도 없이 들끓는 감정 조절이 늘 문제다. 기쁘다가 슬퍼지고 들떴다가 이내 시무룩해진다.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고 괴로움은 늘 곁을 맴돈다. 만남이 기쁘지만 헤어짐은 안타깝다. 이 모든 감정을 딱 잘라 평균을 내서 늘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배지의 다산도 이 같은 감정 처리에 고심이 많았던 것 같다. 강진 병영(兵營)에 병마우후(兵馬虞侯)로 근무하던 이중협(李重協)은 적막한 다산초당으로 찾아와 한 번씩 떠들썩한 자리를 만들어놓고 가곤 했다. 그런 그가 다산도 싫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 3년을 그렇게 왕래하던 그가 하루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기가 차서 곧 서울로 올라갑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다산이 그를 위해 다시 붓을 들었다. "즐거움은 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