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정남(井男) 생일에 장난삼아 쓴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정남(井男) 생일에 장난삼아 쓴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정남(井男) 생일에 장난삼아 쓴다 부잣집은 딸을 낳아 온갖 근심 모여들어도 가난한 집은 아들 낳아 만사가 만족일세. 거긴 날마다 천전을 써 힘겹게 사위 대접하지만 나야 경전 한 가지를 아들에게 읽히면 그만이지. 나는 지금 아들만 낳고 다행히 딸은 없는데 큰놈은 글을 알고 작은놈은 인사를 잘하네. 뉘 집에서 딸을 길러 효부를 만들었을까? 아들을 보내 거만한 사위 만들어야지. 집 지키고 취한 이를 부축할 일 걱정 없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낙을 훗날에 누리련다. 井男生日戱題富家生女百憂集(부가생녀백우집) 貧家生男萬事足(빈가생남만사족) 日費千錢供婿難(일비천전공서난) 只將一經敎子讀(지장일경교자독) 我今生男幸無女(아금생남행무녀) 大..

[가슴으로 읽는 한시] 달을 샀다는 아이에게

[가슴으로 읽는 한시] 달을 샀다는 아이에게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달을 샀다는 아이에게 아이 종이 나를 속여 말했네. "오늘 밤 달을 사다 매달아 놨소." 어떤 시장에서 샀는지는 모르겠으나 달 값을 몇 문(文)이나 주었지? 答奴告買月 僮僕欺余曰(동복기여왈) 今宵買月懸(금소매월현) 不知何處市(부지하처시) 費得幾文錢(비득기문전)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1741∼1826)가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썼다. 평범해 보이지만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아이 둘이 지붕 위로 솟아오른 달을 보고 있다. 어린 종이 장난기가 동해서 자기가 달을 사다 허공에 매달아 놨노라고 뻔한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이라 대꾸한다면 정말 멋이 없는 대답이다. 어린 윤기는 "얼마 주고 샀는데?"라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낙엽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낙엽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낙엽시 천지는 거대한 염색 가게 환상의 변화를 어쩜 저리 서두를까? 발갛고 노란 잎을 점점이 날리는 바람 붉은 꽃과 흰 버들솜에 불어왔었네. 봄과 가을 번갈아 바뀌어도 태양은 양쪽 어디에도 머물지 않네. 공(空)과 색(色)이 뒤집히는 동안 성큼성큼 세월은 흘러가누나. 落葉詩天地大染局(천지대염국) 幻化何太遽(환화하태거) 丹黃點飄蘀(단황점표탁) 紅素吹花絮(홍소취화서) 春秋迭代謝(춘추질대사) 光景兩無處(광경양무처) 空色顚倒間(공색전도간) 冉冉流年去(염염유년거) 1825년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 ~1845)가 낙엽을 읊은 시 8편을 지었다. 가을이 되면 천지는 거대한 염색 가게로 바뀐다. 이 염색 가게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환상적 변화는 그 ..

[가슴으로 읽는 한시] 표암댁

[가슴으로 읽는 한시] 표암댁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표암댁 산마루 소나무는 천 그루 만 그루건만 집문서에는 아예 남산이 빠져 있네. 사는 집이 속된 세상에 속해 있어도 자연의 한가함은 제법 남아 있나니 서늘한 솔바람은 난간에 불어오고 짙푸른 산빛은 옷깃에 묻어나네. 우연히 이런 곳에 값을 매기지 않다니 값을 치를 데가 없어 그대 걱정이겠네. 豹菴宅 嶺松千萬萬(영송천만만) 宅券無南山(택권무남산) 也是世間物(야시세간물) 尙餘丘壑閒(상여구학한) 凉濤灑軒檻(양도쇄헌함) 積翠開襟顔(적취개금안) 偶此不論價(우차불론가) 愁君無價還(수군무가환)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1720~ 1783)가 저명한 화가 표암 강세황의 집을 찾아갔다. 표암은 마침 서울 남산 자락에 집을 새로 사서 차헌(借軒)이란 이름을 붙였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시골 마을 꽃

[가슴으로 읽는 한시] 시골 마을 꽃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시골 마을 꽃 시골 마을 꽃은 오두막집을 환히 밝히고 대로의 버들은 높다란 담장을 덮었군. 병이 들어 문 닫고 지냈거니 잠깐 노니는 것이 어찌 미친 짓이랴? 나무하는 아이는 피지도 않은 꽃가지를 머리에 꽂았고 나물 캐는 소녀는 막 자라는 순을 캐는구나. 시냇가에 쓸쓸히 앉았노라니 그대 다가와 술 한잔을 권하네. 村花村花明小屋(촌화명소옥) 官柳覆高墻(관류복고장)廢門緣多病(폐문연다병) 偸閑豈是狂(투한기시광)樵童簪未發(초동잠미발) 菜女折方長(채녀절방장)溪上悄然坐(계상초연좌) 君來勸一觴(군래권일상) 이광현(李匡顯, 1707~1776)의 시다. 30년을 부산에서 유배 생활하며 그 고독함을 시로 달랬다. 길고긴 겨울 내내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몸..

[가슴으로 읽는 한시] 되게 추운 날

[가슴으로 읽는 한시] 되게 추운 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되게 추운 날 북악은 높이도 깎아지르고 남산은 소나무가 새까맣다. 솔개 지나가자 숲은 오싹하고 학이 울고 간 하늘은 새파랗다. 極寒 北岳高戌削(북악고술삭) 南山松黑色(남산송흑색) 隼過林木肅(준과임목숙) 鶴鳴昊天碧(학명호천벽)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 1805)이 어느 몹시도 추운 겨울날 서울의 풍경을 묘사했다. 제목은 '극한(極寒)'인데 춥다는 말 한마디 없다. 늘 보던 북악의 큰 바위가 오늘따라 더 날카롭게 솟아 보이고, 남산의 소나무는 파랗다 못해 검게 보인다. 그렇잖아도 오싹하는데 솔개가 지나가자 숲은 더 움츠러들어 적막하다. 그 적막한 창공을 가르며 학이 날다가 '꽥!' 우는 소리에 새파랗게 질린 하늘도 금이 갈 듯하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골목길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골목길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골목길에서 밝은 해가 굴러서 서쪽으로 떨어지면 그때마다 나는 통곡하고 싶어진다. 그러려니 일상으로 여기는 세상 사람들 그냥 다만 저녁밥을 내오라 재촉한다. 衚衕絶句 白日轣轆西墜(백일역록서추) 此時吾每欲哭(차시오매욕곡) 世人看做常事(세인간주상사) 只管催呼夕食(지관최호석식) 영조 말엽의 천재 시인이자 역관인 이언진(李彦瑱·1740~1766)의 시다. 세상을 밝히던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때면 시인은 통곡하고 싶어진다. 모두들 배고프다며 밥을 내오라 재촉하는 시간이다. 해가 져서 저녁밥을 찾는 그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을 시인은 왜 타박하는 걸까? 시인 자신도 그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텐데 말이다. 시인이 해가 질 때면 통곡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 해를 보내며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 해를 보내며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한 해를 보내며 골짜기로 가는 긴 뱀처럼 서둘러 해가 넘어가는 때라 눈앞으로 지나는 세월을 보며 오랫동안 상념에 젖어 있다. 나이 든 얼굴은 움츠러들어 귀밑머리엔 서리가 내려앉고 추위는 기세등등하여 나뭇가지엔 눈이 얹혀 있다. 글 읽는 사람이니 스스로 힘써야 할 뿐 청산 밖 세상사야 내가 뭘 알겠는가? 아름다운 약속을 남겨 술동이를 가득 채워놓고서 꽃을 피우는 첫 번째 바람이 불 그날을 기다리노라. 次古韻 赴壑脩鱗日不遲(부학수린일부지) 年光閱眼久尋思(연광열안구심사) 衰容縮瑟霜添鬢(쇠용축슬상첨빈) 寒意憑凌雪在枝(한의빙릉설재지) 黃卷中人須自勉(황권중인수자면) 靑山外事也何知(청산외사야하지) 十分盞酒留佳約(십분잔주유가약) 會待花風第一吹(회대화풍..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새해 첫날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새해 첫날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새해 첫날 마흔 살은 다부지게 일할 나이 오늘로 두 살을 더 먹게 됐네. 도소주는 뒤에 마셔도 좋지만 늙고 병들기는 남보다 빠르네. 세상살이는 어떻게 힘차게 하나? 살림살이는 가난을 꺼리겠는가? 은근하게 한 해의 일 다가오는데 매화도 버들도 생기가 돋네. 元日 四十是强仕(사십시강사) 今添又二春(금첨우이춘) 屠蘇宜後飮(도소의후음) 老病已先人(노병이선인) 身世何由健(신세하유건) 生涯敢諱貧(생애감휘빈) 殷勤一年事(은근일년사) 梅柳亦精神(매류역정신)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1420~ 1488)이 1461년 새해에 지었다. 해가 바뀌어 마흔두 살이 되었다. 그 시대 그 나이 사람에게도 새해는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다. 도소주(屠蘇酒)는 설날에 마시는..

[가슴으로 읽는 한시] 눈 속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눈 속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눈 속에서 홀로 술을 마시다 펄펄 내리는 눈을 마주했으니 어찌 술 생각이 나지 않으랴. 석 잔으로는 채워지지 않아서 마시다 보니 한 말까지 이르렀네. 雪裏獨酌 坐對紛紛雪(좌대분분설) 那能不飮酒(나능불음주) 三杯猶未足(삼배유미족) 行且到盈斗(행차도영두) 도운(陶雲) 이진망(李眞望·1672~ 1737)은 대제학과 형조판서 등 고관(高官)을 역임하고 영조의 사부(師父)가 된 명망가였다. 그는 술을 좋아했지만 대인관계를 잘하기 위해 마시지 않았다. 홀로 마시는 술을 가장 즐겼다. 비가 내리면 한 잔 마시고, 매화가 피면 한 잔 마셨는데 술이 가장 간절한 것은 눈이 내리는 때였다. 그때가 되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천지변화에 촉발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