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난자의 한줄로 고전 91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법정 스님의 잠언집’에 있는 말씀을 신년의 입춘 부처럼 독자에게 전하고 싶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고. 얼어붙은 땅에도 꽃은 피고 경자(庚子)년 백서(白鼠)들도 배곯는 일 없으며, 신문 읽기가 두려운 기사 따위는 만나게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왜 모두 행복하지 못한가. 아마도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더 많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불법이 자행되는 사회, 악의 순환이 거듭되는 정의롭지 못한 나라에서 행복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덜 갖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법정 스님은 타이른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고 다독인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고 우리를 깨..

인생은 나그네길

夫天地者는 萬物之逆旅며 光陰者는 百代之過客이라 무릇 하늘과 땅은 만물의 주막집이며 시간은 백대의 지나가는 나그네일러라.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의 서두다. 복숭아와 자두꽃이 핀 봄밤, 정원에 모여 시회(詩會)하는 자리에서 그는 말한다. “거품 같은 인생이 꿈과 같으니 그 기뻐함이 얼마나 되겠는가? 옛사람이 촛불을 잡고 밤에 논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음이다”라고. 천지와 광음은 우주와 시간이다. 역려(逆旅)와 과객(過客)은 주막집과 나그네. 삿갓 쓰고 평생을 방랑하던 김병연은 ‘천지자만물지역려’(天地者萬物之逆旅)라는 제목으로 시를 남겼다.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신비한 무대에 말을 달려서 지나는 손(客)은 다 이러하도다. … 아득한 우주의 영원함을 생각해보면 길을 아는 선생이 어젯밤..

佳緣

佳緣 “…17세에 짝이 돼 나와 41년간을 같이 살았다. 내가 양친을 봉양하고 제사 받들며, 친척을 친히 하고, 벗을 사귀는 데 세군(細君)이 내 뜻에 순종해 맞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략) 내 집이 가난했지만 세군은 가난한 것을 가지고 내게 누를 끼치지 않아서 내가 그 때문에 탈 없이 날마다 옛 책을 읽을 수 있었으므로 위로는 당우(요순)시대의 고문(古文)과 아래로는 제자백가를 섭렵해 고문의 취지를 알 수 있었다. (하략)” 미수 허목(許穆·1595∼1682) 선생께서 친히 아내의 묘명(墓銘)에 적은 글월을 보고(‘미수기언’) 가슴에 많은 소회가 일었다. 첫째는 세군으로 표현된 아내 이 씨의 미덕이요, 둘째는 지아비의 인품이었다. 그의 ‘자명비(自銘碑)’에 의하면 늙은이 허목은 눈썹이 길어 눈을 덮..

歲寒圖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겨울이 와야만 소나무와 잣나무가 얼마나 푸른지를 알 수 있다. 공자의 ‘논어’에서 이 글을 대할 때보다, 추사 김정희의 적거지 ‘세한도’의 현장에서 그분의 발문을 보며 이 글이 더욱 감명 깊게 다가왔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 59세 때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집과 소나무의 간략한 배치, 여기에 ‘세한도(歲寒圖)’라 쓴 화제의 글씨가 모든 정황을 짐작하게 해준다. 추사는 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내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用晦而明

用晦而明 斂華于衷 久而外燭염화우충 구이외촉 빛을 속에 감춰두라, 오래되면 밖으로 빛나리라 이덕무가 ‘영처문고’의 회잠(晦箴)에 적은 글의 마지막 구절이다. ‘영처’(영處)란 영아와 처녀를 가리키는 말로 작가는 실제로 아이처럼 천진스럽고 처녀처럼 수줍은 사람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자랑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책만 읽는 바보’(看書痴·간서치)로 취급되며 북학파 연암 박지원과는 막역한 벗이었다. “말을 황금처럼 아끼고 자취를 옥과 같이 감추라. 깊이 침묵하고 잠잠하여 꾸미거나 속여서는 안 된다. 빛을 속에 감춰두라, 오래되면 빛나리라.” 이같이 자신을 검속하며 다짐하듯 이 글을 쓴 때는 20대 초반. 양반과 서얼의 신분이 확연하던 때 서얼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주역’의 회장(..

글의 분수

글의 분수 글에도 반드시 분수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자기 생각의 깊이에 알맞은 글을 써야만 어색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평생 수필만 쓰다가 ‘수필’이 된 사람, 매원 박연구 선생의 ‘수필전집’에 수록된 글이다. 2019년 11월 7일. 선생의 고향인 담양 조각공원 안에 문학비가 세워지고 제막식을 겸한 조촐한 축하행사가 있었다. 만추의 양광이 내리쬐는 오후 3시. 곱게 물든 단풍이 주변을 에워싸고 하늘은 맑고 드높았다. 군(郡)에서 마련한 대금 연주의 ‘소쇄원’은 창공을 휘돌아 굽이치는 대숲의 바람 속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시공을 초월한 자연의 한순간, 그 좌표 위에 함께한 자리. 20여 년 전, 강의 도중 선생의 음성이 들려왔다. “글에도 분수라는 것이 있는데 그걸 넘지 않아야….” 꼭 내게 하시는 말..

생텍쥐페리의 귀환

생텍쥐페리의 귀환 아저씨가 온 건 잘못이야. 마음 아파할 텐데. 내가 죽은 듯이 보일 테니까. 그렇다고 정말 죽는 건 아니지만. 생텍쥐페리(1900∼1944)의 ‘어린 왕자’에서 비행기 사고를 당한 아저씨와 조그만 별에서 내려온 어린 왕자가 헤어질 때 나누던 대화다. 돌담 아래 노란 뱀 한 마리가 어린 왕자를 향해 몸을 꼿꼿이 세웠다. 어린 왕자는 뱀의 도움으로 무거운 몸을 벗을 수 있었다. “아저씨가 고장 난 엔진을 고치게 돼서 기뻐. 아저씨는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어린 왕자는 거기에 답도 없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오늘 집으로 돌아가….” 사막의 언덕에서 별로 돌아가는 어린 왕자의 귀환은 곧 생텍쥐페리의 귀환이기도 했다. 그는 우편비행사로 북아프리카를 비행했으..

모든 인간은 무죄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 앞에서 죄를 지었다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장로 조시마를 통해 이 말을 우리에게 전한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 앞에서 죄를 지었다.” ‘악령’에서 스테판이 임종 직전에 되뇐 말도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그러니 모두 무죄로 해주어야겠다고. 그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혁명사상가 페트라?스키 사건에 연루돼 8개월 동안 감금되고 영하 22도의 추운 날, 세묘노프광장 처형대 앞에 세워졌었다. 손발은 말뚝에 묶이고 두 눈은 가려졌다. 다행히 처형 5분 전에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특사가 나타나 극적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지만, 대신 시베리아의 옴스크감옥으로 떠나야 했다. 당시의 심정을 그는 ‘백치’의 주인공 미시킨의 입을 통해 이렇게 설명했다. “…사형선..

秋風辭

歡樂極兮 哀情多 기쁨과 즐거움이 극진함이여, 슬픈 생각이 많도다 한무제(漢武帝·BC 156∼BC 87)의 ‘추풍사(秋風辭)’ 결미 부분이다. 그는 하동에 나아가 토지신께 제사 지내고 오는 도중, 산시(山西)성 펀허(汾河)에 배를 띄워 군신들과 연회를 즐기는데 마침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물결은 허옇게 치솟는다. 15세에 등극한 한무제는 50여 년을 재위하면서 국운을 융성시켰다. 그간의 노고를 돌아보며 어찌 감회가 없었겠는가? 나는 고등학교 때, 시인 김구용 선생에게서 이 시를 배웠다. 운율이 아름다운 아홉 줄의 시는 쉽게 입에 붙었다. ‘추풍기혜(秋風起兮)여 백운비(白雲飛)로다.’ 가을바람이 일어남이여, 흰 구름이 날리도다. ‘초목황락혜(草木黃落兮)여 안남귀(雁南歸)로다.’ 초목이 누렇게 떨어짐이여, 기러기..

책을 읽어라

우리는 이성만으로 진리를 알기에는 너무 약하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한 말이다. 고백록’에는 13세부터 32세까지 청장년기의 방황과 육체적 편력을 겪고 나서 한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하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상서이며 신학서다. 동시에 훌륭한 자전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가 “현대의 모든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석”이라고 할 만큼 신학에 끼친 그의 영향은 지대하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는 그에게 ‘신’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지식을 알고 있는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신’을 아는 자가 행복한 자라고 그는 말한다. 논리를 신봉했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성적인 논리만이 진리를 향한다’고 믿었는데 성자 어거스틴은 이성만으로는 진리를 알기 어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