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스시한조각 131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20] 국가의 본분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20] 국가의 본분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7.01 03:00 1945년 패전과 함께 일본 정부는 수백 만에 달하는 재외 일본인을 본국으로 귀환시켜야 하는 난제에 봉착한다. ‘히키아게(引き揚げ)’라 부르는 20년에 걸친 귀환 사업으로 660만명쯤 되는 대상자 중 629만명이 귀환하였으나, 아직도 현지에 남겨진 사람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소식 불명의 미귀환자와, 귀환자들이 귀국 도중에 겪은 시련은 전후 일본 사회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트라우마의 기저에는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깔려 있다. 전쟁 끝 혼란 속에서 귀환 사업이 순조롭지 못했던 것에 더하여 적지에 남겨진 국민의 안위..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9] 만지(滿持)의 태세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9] 만지(滿持)의 태세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6.17 03:00 일본어에 ‘만오지스(満を持す)’라는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가득함을 유지하다’라는 뜻으로, 보통 ‘준비를 철저히 하여 기회를 기다리다’라는 뜻의 관용구로 사용된다. 한국어로는 만반(萬般)의 준비를 하다, 또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말의 유래는 한(漢)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58년 흉노의 준동이 심상치 않자 문제(文帝)는 유예(劉禮), 서여(徐厲), 주아부(周亞夫)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북방에 파견한다. 문제가 변경(邊境) 사정을 살피고 군을 위무하고자 주둔지를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다. 유예가 파견된 패상(霈上), 서여가 파견된..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8] 정당제 악용하는 선거 정치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8] 정당제 악용하는 선거 정치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6.03 03:00 미국에서는 지역 연고가 없는 타지에서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을 ‘카펫배거(carpetbagger)’라고 한다. 원래는 남북전쟁 직후 혼란을 틈타 남부 주(州)로 몰려간 북부 주 사람들을 부르던 말이었다. 돈벌이를 노려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북부 사람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단어가 현대에 와서는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연고가 약한 지역에서 출마하는 정치인을 지칭하는 말로 전화(轉化)한 것이다. 뉴욕주 상원의원을 지낸 로버트 케네디, 힐러리 클린턴 등이 대표적 카펫배거로 꼽힌다. 다만 미국에선 당 지도부 간섭 없이 해당 지역구 당원과 주민이 후보를 결정하므로 중앙..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7] 재건(再建), 아우프헤벤(Aufheben)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7] 재건(再建), 아우프헤벤(Aufheben)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5.20 03:00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에서 ‘자유’가 35번 등장했다고 해서 화제다. 대통령 본인의 철학을 반영해 직접 다듬은 내용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자유 외에도 ‘재건’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를 재건하겠다는 취지였는데, 5·16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오버랩되면서 묘한 울림을 남기는 단어 선택이었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아우후헤벤(アウフヘーベン)’이라는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都)지사가 도심 수산 시장 이전 문제, 신당 창당 문제 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을 아우후헤벤하..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6] 청와대 영빈관을 외교 명소로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6] 청와대 영빈관을 외교 명소로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5.06 03:00 한남동 외교장관 공관이 대통령 관저로 낙점되었다고 한다. 외교의 장으로 활용하던 공간을 갑자기 내주게 된 외교부로서는 난감할 듯하다. 다만 이런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남동 공관은 외교 시설이기는 하지만 그곳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장관뿐이다. 장관이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특성에서 비롯된 용도의 한정성이다. 차관 이하 간부도 외빈을 맞이할 일이 많지만 청사에서 회의하고 호텔 등 외부 장소에서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일 대사관 근무 시절 ‘이쿠라 공관(飯倉公館)’이라는 곳을 방문하곤 했다. 이곳은 외무성 청사 외부에 있는 일종의 행사용 별관이다. ..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5] 부패 권력과 저승사자 검사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5] 부패 권력과 저승사자 검사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4.22 03:00 전전(戰前) 일본은 권력자들이 국가 자원 배분 권한을 이용해 정상(政商)에게 특혜를 주고 정치 자금을 챙기는 정경 유착 폐해가 극심한 나라였다. 체질화된 정경 유착 앞에서 사법의 견제 기능은 힘을 쓰지 못했고, 군국주의가 발흥한 이후에는 사법 기관 자체가 체제 유지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쟁에 패한 후 새로운 시대를 맞아 정경 유착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선봉에 나선 것은 검찰이었다. 1949년 도쿄 지검에 특별수사부를 창설하여 소위 ‘의옥(疑獄)’ 사건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의옥 사건이란 권력과 결부된 비리, 정치자금 스캔들, 경제 범죄 등을 말한다...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4] 위의 정책, 아래의 대책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4] 위의 정책, 아래의 대책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4.08 03:00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 통치자들은 흉년⋅재해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면 민간 소비를 통제하려 드는 속성이 있었다. 조선 조정과 일본의 에도 막부는 나라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수시로 ‘사치 금지령’을 발령하고는 했다. 대표적인 것이 의복 규제였다. 염색 천 소비가 늘면 환금작물 재배가 늘어나 식량작물 재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이유였다. 18세기 에도 막부의 사치 금령은 구체적이었다. 의복 색을 쥐색·차(茶)색·남색의 3색으로 제한한 것이다. 도시화와 상업 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일본 소비자들은 금령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옷에 대한 욕구가 여전했고, 규제를 피하..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3] 윤 당선인의 자유주의 경제관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3] 윤 당선인의 자유주의 경제관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3.25 03:00 | 수정 2022.03.25 03:00 식당을 운영하다 보니 유명 인사를 손님으로 모실 때가 있다. 몇 년 전에 윤석열 당선인이 방문한 적이 있다. 어찌 하다 보니 잠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내가 쓴 책을 읽었다며 책 말미에 등장하는 ‘헨리 토머스 버클’이라는 19세기 영국 재야 역사학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버클은 ‘영국 문명사’(1857)’에서 문명의 진보를 ‘집단 지성의 축적’으로 표현했다. 집단 지성의 축적 수준은 부의 창출과 분배에 의해 결정되며, 무력 집단이 강제력으로 부를 관리하는 체제로부터 사적 자치와 사유 재산권을 향유하는 시민사회가 독립..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2] 사바세계와 대통령의 공간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2] 사바세계와 대통령의 공간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3.18 03:00 불교 용어인 ‘사바(娑婆)’는 속세(俗世)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사바세계는 본래 하늘, 인간,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육도(六道)를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설법의 편의를 위해 인간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그 뜻을 ‘번뇌, 고통, 더러움으로 뒤덮여 있어 무릇 중생이 참고 견뎌야만 하는 세계’로 풀이한다. 석가가 중생을 구제하고 교화하기 위해 임하는 세계이기도 하고, 청정한 무욕(無慾)의 세계인 ‘정토(淨土)’에 대비되는 의미로 ‘인토(忍土)’, ‘감인토(堪忍土)’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도 사바세계의 뜻풀..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1] 피해국에 대한 연대가 헌법 정신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11] 피해국에 대한 연대가 헌법 정신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입력 2022.03.04 03:00 1948년 정부 수립 후 한국이 당면한 최대 외교 과제는 대일(對日) 강화조약 참가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동란(動亂)의 와중에도 필사의 외교 노력을 기울였으나, 연합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논점은 한국이 일본 통치에 얼마나 저항했으며, 대일 전쟁에 얼마나 기여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1949년 12월 미 국무부 보고서는 “교전 당사자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 한국이 제시한 증거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대 증거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중략) 한국 내의 일본 통치에 대한 저항은 국지적이거나 단기간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