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994

[이규태 코너] 초등학생의 자살

[이규태 코너] 초등학생의 자살 조선일보 입력 2002.11.13 20:14 김시습(金時習)은 다섯 살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했던 신동(神童)이다. 그 소문을 듣고 노정승인 허조(許稠)가 불러 "나는 늙어 쓸모없는 몸이니 늙을 「老」를 넣어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지어보라" 했더니 "늙은 나무도 꽃은 피우나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 했다. 세종대왕이 듣고 불러 "동자의 배움은 백학이 청송 끝에 춤추는 것 같도다" 하고 대구(對句)를 지으라 시켰더니 "성주의 덕은 황룡이 벽해에 꿈틀거리는 것 같도다(聖主之德黃龍 碧海之中)"라 지어 바쳤다. 바흐·괴테·차이코프스키도 다섯 살 때부터 비범한 재능을 발휘했다. 이처럼 신동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긴 있는데 다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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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전자 대리투표

[이규태 코너] 전자 대리투표 조선일보 입력 2002.11.14 19:40 한국에도 왔던 제정러시아 작가 곤차로프의 대표작에 '오브로모프'가 있다. 농노(農奴)시대의 유복한 지주인 주인공 오브로모프는 기거하고 세수하며 양말 신는 것까지 몸종이나 하녀·유모의 수발로 살아온 터라 평생을 누워서 사는 무감동 무관심 무기력 무책임의 사무주의(四無主義)자다. 올리가라는 순박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나 남들 앞에 나갈 때 손을 들어주고 키스할 때 안아주어야 하는 그 일이 번거로워 모든 것을 어린애처럼 뒷바라지해주는 연상의 미망인에게 도망친다. 하기 싫은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편리만 좇아 폐물인간으로 치닫는 것을 오브로모프주의라 한다. 옛날에는 부(富)가 오브로모프주의의 요인이었지만 현대는 발달하는 과학기술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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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손기정

[이규태 코너] 손기정 조선일보 입력 2002.11.15 20:06 노후의 손기정옹이 그가 마라톤을 제패했던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을 지팡이 짚고 찾아보았다. 금메달리스트들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 앞에 이르러 손옹은 떠날줄을 몰랐다. 깎여져 없어진 자신의 국적(國籍)부분을 올려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던 것이다. Japan으로 돼 있었던 손옹의 국적을 당시 국회의원이던 박영록(朴永祿)씨가 울분을 못가누어 준비해간 끌로 뭉개버렸던 것이다. 이에 당시 서독 경찰은 기념물 훼손으로 체포령을 내리는 해프닝까지 벌였던 상처입은 영광 앞에 발이 쉽게 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스타디움 서북쪽을 굳이 찾아 거닐던 손옹은 주저앉아 눈을 감고 얼굴을 묻었다. 지쳐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당시 손옹은 한국인 출전 선수인 남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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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갸름해지는 얼굴

[이규태 코너] 갸름해지는 얼굴 조선일보 입력 2002.11.17 20:09 선망하는 얼굴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고대 삼한시대의 한국인은 편두(扁頭)라 하여 머리 앞뒤가 펀펀하고 옆으로 퍼진 얼굴모양을 선망했다. 「후한서(後漢書)」에 삼한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돌로 머리를 눌러 펀펀하게 한다는 풍습이 적혀 있다. 진한 땅인 경상도 예안리(禮安里) 유적에서 출토한 4세기의 여자 시신에서 두개골 가공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돌로 짓눌러 편두를 만든다는 진한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3국시대가 꽤 진행된 때까지도 편두가 시술됐음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한다. 두개골 가공은 고대사회에 퍼져 있었던 세계적 습속이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계급 표시라는 설, 우생학적 시술이라는 설, 미적 관념에서 변형시켰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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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왕따 심리학

[이규태 코너] 왕따 심리학 조선일보 입력 2002.11.18 19:41 한 신인가수를 중심으로 모인 10대 동호인클럽에서 동료 하나가 착한 척한다고 또래들의 눈밖에 나 폭행을 당해 죽었다. 이제 왕따는 정신적 괴로움을 주는 식물성 가학(加虐)을 벗어나 죽이기까지 하는 동물성 가학 단계에 들고 있다는 신호다. 때마침 교육개발원에서는 왕따시키는 요인으로 '삼척주의'를 들었다. 잘난 척, 예쁜 척, 착한 척하는 세 가지 척이 따돌림을 당하는 요인으로 조사된 것이다. 왕따 살인도 삼척주의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의 과시인 이 삼척이 따돌림의 시발이 되는 이유는 한국인에게 별나게 강한 또래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우리 한국인은 조상 대대로 한 마을에 태어나 자라서 그 마을이나 이웃 마을 처녀·총각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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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개소리 번역기

[이규태 코너] 개소리 번역기 조선일보 입력 2002.11.19 19:44 '찰리와의 여행'은 노벨상 수상 작가 스타인벡이 애견과 더불어 넉 달 동안 미국 38주 1만6000㎞를 여행한 기록으로 개와의 대화가 심금을 울려 주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파리에서 태어난 늙은 푸들인 찰리는 프랑스 말 명령 아니고는 동작이 느릴 만큼 보수적이고, 길 걸을 때 자동차가 다가올 때와 자전거가 다가올 때의 짖는 소리가 다를 만큼 말이 통하는 사이였다. 프랑스의 여류작가 콜레트의'동물과의 대화'에서 블루독인 토비의 개소리는 사람소리처럼 음흉하지 않고 카프카의 '어느 개의 회상'은 개로 하여금 인간사회를 빈축하는 줄거리인데 공상적이긴 하나 개소리가 이토록 진지할 수 없다. 암캐와 사별한 수캐의 자살에 대한 동물학자 시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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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溫食文化論

[이규태 코너] 溫食文化論 조선일보 입력 2002.11.20 19:36 중종때 선비 김정국(金正國)은 다섯 가지 반찬으로 밥을 먹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한데 밥먹는 것을 본 사람들은 세 가지 반찬을 넘는 적이 없음을 알고 왜 "'다섯 반찬'이라 거짓말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에 "두 가지는 보이지 않은 반찬이기에 자네들이 보지 못했을 뿐이네" 하고, "배 고팠을 때 밥을 찾아 먹으니 시장이 반찬이요, 반드시 밥과 국을 따뜻하게 해 먹으니 그것이 보이지 않은 두 가지 반찬일세" 했다. '따뜻한 밥이 고기반찬이요, 구박받는 신세를 찬밥신세, 소외받는 신세는 식은 국 신세라는 속담도 있듯이 우리 한국 식문화의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가 모든 음식을 따뜻하게 해먹는 온식(溫食)을 들 수 있다. 술도 거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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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피

[이규태 코너] 피 조선일보 입력 2002.11.21 20:25 경남 함안 산성에서 6세기 무렵의 신라 죽간(竹簡)이 대량 출토되었는데 거의가 어데 사는 아무개가 당시 곡식이던 피(稗)를 보낸다는 군량미 물표였다. 죽간이란 종이 이전의 문서로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안압지 발굴 때 처음 출토됐었다. 피는 벼처럼 생겨 논에 기생하는 잡초로 못자리 때부터 피사리라 하여 그 제거에 농부의 품을 많이 소모시켜 왔지만 고대에는 중요한 곡식으로, 신라시대에는 수자리 사는 병졸의 군량미로 충당했음이 이번 죽간에서 드러나 피의 내력을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장자(莊子)는 사람의 도(道)가 피(稗)로 났다했을 만큼 인생에 시사한 바 많은 작물이다. 오곡(五穀)에 끼지 못하지만 찧으면 알곡 비율이 오곡의 어느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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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배뱅잇굿

[이규태 코너] 배뱅잇굿 조선일보 입력 2002.11.22 19:43 몹시 기다리던 사람이나 반가운 사람이 오면 「배뱅이가 왔다」고 한다. 배뱅이 굿에서 무당이 죽은 배뱅이의 넋을 불러들이는데 「왔구나 왔소이다/ 황천 갔던 배뱅이가/ 왔소이다」는 그 가사가 서민 심정에 영합되어 배뱅이가 반가운 사람의 대명사가 돼버린 것이다. 판소리로 발전하기 이전 무가(巫歌)의 공통점으로 여인으로 하여금 비극적으로 죽게하여 한과 원을 응어리지게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로 그 응어리가 이승과 저승간을 오가는 매체(媒體)가 되기 때문이다. 무가의 여주인공들이 예외없이 비극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무가 「버리떼기」는 일곱 번째도 딸을 낳자 아들낳기를 바랐던 용왕이 이를 황천강에 버리게 했다 해서 버리떼기다. 비운의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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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廣通橋

[이규태 코너] 廣通橋 조선일보 입력 2002.11.24 20:14 한양에서 가장 넓고 가장 복판에 있는 가장 큰 돌다리인 광통교는 천시(天時)를 알리는 종루(鐘樓)와 가장 가까이 있어 천심과 통한다 하여 내로라하는 점쟁이들은 광통교에 자리잡는 게 관례였다. 「용재총화」에 김을부라는 광통교 점쟁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흉하다 하면 길하고, 급제한다면 반드시 낙방하는 거꾸로 점으로 팔도에 소문나 있었다 했다.광통교는 어린이 공원이기도 했다. 겨울날 연날리기로 붐비는데 연 싸움으로 연끈이 끊어져 날아 가면 이를 쫓아 담을 넘고 장독을 깨며 추적하는 맹렬 유희였다. 격구(擊毬)라는 하키도 이 광교 유희 가운데 하나였는데 치는 공에 불의 부정한 왕족이나 정승 판서의 이름을 붙여 후려치는 관례가 있어 조정에서 문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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