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994

[이규태코너] <6544> 백살 피터 팬

[이규태코너] 백살 피터 팬 조선일보 입력 2005.01.09 18:03 | 수정 2005.01.09 18:06 어른되기를 거부하는 영원한 소년 피터팬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됐다하여 영국에서는 해를 넘겨 갖은 축제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여타의 나라들에서는 이 피터팬 신드롬으로 병들어가는 가정문제 사회문제를 두고 재평가하고 있다. 곧 피터팬은 20세기의 인간 실패작인 미숙(未熟)어른 곧 ‘어른아(Man child)’를 양산시켰으며 그 병폐를 한국 실정에 맞추어 보면 이렇다. 걸프렌드 웬디가 왜 도망칠 생각만 하느냐고 묻자 피터 팬은 아버지 어머니가 자신이 자라서 뭣이 돼야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고 언제까지나 어린이로 남고 싶어서라고 대꾸한다. 과거 30여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각종 미디어나 서적 그..

이규태 코너 2022.10.09

[이규태 코너] 멕시코 哀史

[이규태 코너] 멕시코 哀史 조선일보 입력 2005.01.11 17:58 노예노동으로 고통받았던 멕시코 이민 최초의 사진이 보도되어 눈길을 끌었다. 멕시코 이민선이 인천을 떠난 것은 꼭 100년 전인 1905년 3월 6일이요, 멕시코 유카탄에 도착한 것은 5월 12일, 어저귀라는 가시 돋친 섬유작물 농장에 분산 수용된 것은 그 사흘 후다. 이 이민사진의 촬영이 1905년 5월로 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농장에 배치된 직후의 사진이며 한국에서 입고 간 바지 저고리에 짚신 차림의 이민도 볼 수 있음은 그 때문이다. 소년들도 7~8명 보이는데 아버지 어머니 따라온 이민가족으로 큰 아이는 하루 품삯이 25전, 작은 아이는 12전이었다. 어른 품삯은 35전인데 하루 식량값으로 1인당 25전을 거둬갔으니 4년 동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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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一人一籍簿

[이규태 코너] 一人一籍簿 조선일보 입력 2005.01.13 17:53 유럽사람은 달에서 찌그러진 여인의 얼굴을 보고 로마사람들은 아가리 벌린 늑대를 보았다. 아랍사람은 다리 저는 낙타를 보며, 중국사람은 두꺼비를 보았다. 셰익스피어는 오셀로로 하여금 달이 가까이 올수록 사람들의 머리가 돈다고 외치게 했다. 세상 사람들의 달에 대한 이미지는 이처럼 부정적인데 오로지 우리 한국사람만은 달에 초가삼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자 했으니 달에서 행복의 원점을 찾았다. 달의 명절이면 부모형제 모여 조상까지 모셔 받들었으니 달은 유명(幽明)을 초월한 가족의 구심이요 가족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형제자매 간에 싸움을 하거나 욕심을 부리거나 샘을 내거나 헐뜯거나 게으르거나 검약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말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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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뉴 리더십<6547>

[이규태코너]뉴 리더십 조선일보 입력 2005.01.16 17:42 망해 가던 중국 원(元)나라는 소금장수 출신의 장사성(張士誠)과 가난으로 절에 버려진 주원장(朱元璋)의 대결로 압축됐었다. 주원장이 장사성의 주력부대를 포위코자 험악한 산을 넘어 후방으로 돌고 있을 때 일이다. 협곡의 외길 복판에서 산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있었다. 새끼 품은 짐승을 해치면 업보(業報)를 받는다는 동승(童僧) 시절의 믿음이 떠올랐다. 주원장은 사활이 걸린 그 작전을 포기하고 그 산오리가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아 제발로 길을 비킬 때까지 여러 날을 기다렸다. 물론 작전은 탄로나고 전세는 불리하게 기울었다. 한데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적의 부장들이 부하를 거느리고 속속 주원장 휘하로 투항해 왔다. 천하를 얻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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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노인 자살

[이규태 코너] 노인 자살 조선일보 입력 2005.01.18 18:18 그림형제는 인생 70을 짐승에 비유한 독일 민화를 동화로 펴냈다. 신(神)이 동물의 수명을 정할 때 평등하게 30년으로 했다. 이 결정을 보고 노새와 개, 원숭이는 고통이 따르는 긴 수명에 불만을 품고 항의, 각기 18년 12년 10년을 감면받았다. 곁에 있던 욕심쟁이 사람은 이 감면받은 40년을 덤으로 얻어 70 수명이 됐다. 본명 30년이 지나고 노새의 18년은 남을 위해 등짐 나르는 세월로 보내고 개의 12년은 이도 빠지고 이 구석 저 구석 숨어다니며 불평만 하고 응얼대며 지새운다. 남아있는 원숭이의 10년은 기억력도 없어져 언행이 엇박자를 놓아 손가락질과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늙음'이란 대저를 남긴 보브알은 미개 종족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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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북한 재산상속법

[이규태 코너] 북한 재산상속법 조선일보 입력 2005.01.20 17:57 | 수정 2005.01.20 19:01 옛 시골에서 예닐곱 살만 되면 논 한쪽 여남은 평을 떼어주어 농사일을 시켰는데 이를 '내논'이라 했다. 그 내논에서 모를 심고 피사리를 하며 논물을 대고 김을 매며 새를 보고 벼를 베는 일을 도맡아 시켰다. 곧 내논은 농사 견습답이다. 밖에서 놀다 오줌이 마려우면 달려가 내논에 가서 누었고 길 가다가 짚신 헤진 것이나 말라 비틀어진 쇠똥이 뒹굴고 있으면 이를 주워들고 내논에다 던졌다. 누가 굳이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그렇게 내논을 걸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내논의 노동 대가는 그 내논에서 주운 이삭으로 엿 한 가래 사먹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에서 터득한 심성은 막중하다. 농사 짓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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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하루 밥 두공기

[이규태 코너] 하루 밥 두공기 조선일보 입력 2005.01.23 18:07 지난해 한국 사람은 하루 두 공기씩의 밥을 먹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어림해서 1홉 남짓의 쌀이면 두 공기의 밥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니 하루 1홉 인생이다. 15년 전에 서울 사람 한 달에 1말ㅡ곧, 하루에 3홉꼴의 쌀을 먹은 것과 비겨 보면 3분의 1이나 덜 먹는 셈이다.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적어 남긴 바로 200여년 전의 장정 한 사람이 먹는 쌀은 조석 합쳐 7홉이요, 농사철에는 3홉의 점심이 가산된다 했으니 10분의 1도 안 먹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대식(大食)은 알려져 있다. 신라 때 삼국통일을 한 김춘추(金春秋)는 하루에 쌀 서말, 꿩 9마리, 술 6말을 먹었다 했으니 장정 한 달 먹을 분량을 하루에 먹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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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아우슈비츠의 노랑꽃

[이규태 코너] 아우슈비츠의 노랑꽃 조선일보 입력 2005.01.25 18:09 천당 문을 지키고 있는 베드로가 손가락질하며 동서고금 통틀어 사람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현장이라고 지목한 아우슈비츠, 그 정문에 '일하면 자유를 얻는다'는 독일어로 된 구호가 걸려 있다. 한데 유심히 보면 일을 뜻하는 ARBEIT의 'B'의 위아래가 거꾸로 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용소의 피수감자가 작업한 문자 현판으로 공포의 거대한 억눌림에 들키지 않으려고 극소화시킨 작디작은 저항으로 심금을 울린다. 이탈리아계 유대인이 수용됐던 21호 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시각각 불려나가 가스실에서 죽어 돌아오지 않는 감방, 영양 실조로 몸 일으키기도 힘겨운데 누군가 창가에 서서 석양이 아름답다고 하자 기어가고 부축하며 창가로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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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몽당 연필

[이규태 코너] 몽당 연필 조선일보 입력 2005.01.27 17:52 연필 사달라면 어머니는 이전에 쓰던 연필을 꼭 가져오라 시켰다. 짧아진 그 연필을 새끼손가락 틈에 끼워 그 길이를 견주어 손가락보다 짧아야만 사주었던 기억이 난다. 필갑에는 몽당연필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살면서 물심으로 욕심이 나고 샘이 날 때마다 몽당연필을 견주던 어머니의 새끼손가락이 생각나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유품전에서 몽당연필이 가득한 손자 필통을 보았다. 새끼손가락 길이보다 짧았던 그 몽당연필들을 보고 여사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서도 손가락과 견주는 근검 습속이 있었던가 물어보고 싶었었다. 한 중견 시인이 미당 서정주를 집으로 찾아가 배고파서 시 못 쓰겠다고 한 일이 있다. 이에 대한 미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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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광화문 현판

[이규태 코너] 광화문 현판 조선일보 입력 2005.01.30 17:51 광화문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태조 4년 9월로 새 궁궐을 다 지어놓고 남문을 광화문이라 한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이다. 한데 ‘세종실록’ 8년 10월조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경복궁 안의 여러 문이름을 짓게 했는데 남문을 광화문이라 한다 했음으로 미뤄 그때까지는 정문(正門)으로 불렸던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에 광화문의 옛이름이 정문이었다 하고 정도전(鄭道傳)이 정문으로 이름을 지은 뜻을 “이 문을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광화문이라는 본 이름 대신 정문이라는 보통명사로 불려오다가 세종 때 중수와 더불어 본래 이름인 광화문으로 정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광화문 현판 글씨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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