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328] 독서일월 (讀書日月)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다산은 강진 동문 밖 주막집 뒷방에 서당을 차려 생도를 받아 가르치면서 아동 교육에 대한 글을 여럿 남겼다. 문집에 실린 것 외에 '교치설(敎穉說)' 같은 친필이 전한다. 최근 강진 양광식 선생이 펴낸 '귤동은 다산 은인'이란 책자에서 또 '격몽정지(擊蒙正旨)'란 다산의 새로운 글 한 편을 보았다. 말 그대로 어린이의 몽매함을 일깨우는 바른 지침이다. 글 가운데 독서일월(讀書日月), 즉 독서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인생에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은 모두 해야 5년에 그친다. 11세 이전에는 아직 멋모르고, 17세 이후로는 음양과 즐기고 좋아하는 물건 등 여러 가지 기호와 욕망이 생겨나서 책을 읽어도 그다지 깊은 유익함이 없다. 그 중간의 5년이..

[정민의 世說新語] [327] 생사사생(省事事省)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홍석주(洪奭周·1774~1842)는 책 여러 권을 동시다발로 보았다. 빡빡한 일정 속에 다양한 독서를 배치해 조금씩 야금야금 읽었다. 아침에 머리 빗을 때 읽는 책과 안채 자리 곁에 두는 책이 달랐다. 머리맡에 두고 잠자기 전에 읽을 책은 또 달랐다. 진도는 더뎠지만 잊어버리고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덮게 되곤 했다. 이런 독서 습관은 공직에 나가 정신없이 바쁠 때도 한결같았다. 그때는 주로 '한서(漢書)'를 읽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일어난 일에 관한 기록이어서 생각해볼 거리가 많았다. 공무에 지쳐 귀가해도 반드시 몇 줄이라도 읽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 피곤하면 눈을 감고 전에 읽은 글을 암송했다. 외우다 잠이 들곤 했는데 입은 그대로 글을 외우고 있었고 글자도..

[정민의 世說新語] [326] 형제비타(兄弟匪他)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손변(孫抃)이 경상관찰사로 있을 때 일이다. 동생이 누나를 소송했다. 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동생에게 검은 옷과 검은 갓, 미투리 한 켤레, 종이 한 권만 주고 나머지는 다 자신에게 물려주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남긴 문건까지 보여주었다. 둘을 불러 사정을 들어보니 당시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떴고, 누이는 시집을 갔고 아들은 고작 7세였다. 손변이 말했다. "부모 마음이 똑같다. 시집간 딸에게만 후하고 어미 없는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박하게 했겠느냐? 아들이 누이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데 재물을 나눠주면 동생을 잘 돌보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들이 자라면 이 종이로 소장을 써서 검은 관에 검은 옷을 입고 미투리를 신고 관에 소송하면 바로잡아 줄 것을 알고 이 ..

[정민의 世說新語] [325] 잠시광경 (暫時光景)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독서보'를 읽는데 글 속의 '잠시광경(暫時光景)'이란 말이 나를 툭 건드린다. 잠시광경이라, 이 말 때문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렇다. 세상만사가 다 잠시광경에 지나지 않는다. 변치 않을 것 같았던 사랑도 용서할 수 없는 미움도 눈앞을 스쳐 가면 잠시광경일 뿐이다.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연암 박지원의 친필 서간첩은 안의와 면천 현감 시절에 집으로 보낸 편지들을 묶은 것이다. 읽을 때마다 그가 붙든 잠시광경 너머로 그가 보인다. 그중 한 대목은 이렇다. "집을 수리할 때 벽 사이에 새로 '외가 익으면 꼭지가 떨어진다(고숙체락·苽熟蒂落)'는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놓았더니, 감사(監司)와 다른 수령들이 모두 비록 벽 사이에 써 붙이기는 했지만 꼭지 빠진 자리는 없는 것 같으니 ..

[정민의 世說新語] [324] 정좌식심 (靜坐息心)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주자(朱子)의 '반일정좌(半日靜坐) 반일독서(半日讀書)'란 말을 사랑한다. 하루의 절반은 고요히 앉아 내면을 기르고 나머지 반은 책을 읽는 데 쓴다. 그에게도 이것은 꿈이었을 것이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리고 회의는 끝도 없다. 한 사람을 겨우 보내자 다른 사람이 찾아온다. 이런 나날 속에 내면은 황량하고 피폐해져서 꿈조차 어지럽다. 명나라 탕빈윤(湯賓尹)의 '독서보(讀書譜)'를 읽다가 원황(袁黃·1533~1606)이 쓴 '정좌공부(靜坐工夫)'란 항목에 절로 눈길이 가서 멎는다. "정좌(靜坐)를 하려면 먼저 식심(息心), 즉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한다. 일상 속에서 그때그때 연습해서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내고 버리기 힘든 것을 버린다. 한 가지를 참아내니 딱 그만큼의 수..

[정민의 世說新語] [323] 회근보춘(晦根葆春)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1675년 7월, 월출산 자락 영암 구림 땅에 유배된 김수항(金壽恒·1629~ 1689)은 '화도시(和陶詩)' 연작 50수를 지으며 안타까운 시간을 추슬렀다. 처음 공주를 지날 때만 해도 "어이 그릇 육신의 부림을 받아, 괴로이 티끌 그물 걸려들었나. 그래서 세상 이치 통달한 이는, 처세에 이름 없음 높이 보았지(胡爲誤形役, 苦被塵網縈. 所以曠達人, 處世貴無名)" 하며 나락에 떨어진 처지를 한탄했다. 겨울 들어 마음이 안정되자 시상도 차분해졌다. '동운(同雲)' 4장을 지었다. 동운은 폭설이 내리기 전 하늘에 자욱하게 낀 먹구름이다. 제4장만 읽어 본다. "회오리바람 세차, 잎은 가지 떠나간다. 뿌리에 감춰 지녀, 내 화창한 봄 피워내리. 잃어도 줄지 않고, 얻은들 늘지 않네...

[정민의 世說新語] [322] 탐득과수 (貪得寡羞)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월출산 아래 백운동 별서정원은 이담로(李聃老·1627~?)가 처음 조성한 이래 13대를 이어 가꿔온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다. 다산이 제자 초의를 시켜 그린 그림이 남아 있고 다산 본인도 친필로 백운동 12경을 노래해 예찬했다. 김창흡, 김창집 형제의 8경시가 남아 있고 그 밖에 쟁쟁한 문인들이 8경 또는 10경으로 앞다퉈 예찬했던 호남의 대표적 별서다. 다행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왔다. 마당을 관통해 흐르는 유상구곡(流觴九曲)은 비원과 포석정 외에 민간 정원으로는 이곳이 유일하다. 바로 곁에 보조국사 지눌, 대각국사 의천, 원묘국사 요세, 진감국사 혜심 등 고려 4국사의 체취가 남은 백운사 옛터가 덤불 속에 묻혀 있다. 당대에 이름 높던 별서요, 고..

[정민의 世說新語] [321] 시유삼건 (侍有三愆)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영조 즉위년인 1725년 3월 13일 시민당(時敏堂)에서 '논어' 진강(進講)이 있었다. 군신이 번갈아 '계씨(季氏)' 편을 읽고 토론이 이어졌다. '예악유도(禮樂有道)' 장의 "천하에 도가 있으면 예악(禮樂)과 정벌(征伐)이 천자에게서 나오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에게서 나온다"는 대목을 두고 강관(講官) 신사철(申思喆)이 말했다. "상하의 명분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천자는 천하를 다스림에 예악과 정벌로 운용합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얕잡아 보고 윗사람이 권위를 지키지 못해 제후가 월권해서 천자의 일을 하고 대부가 월권해서 제후 일을 하면 이는 이치를 대단히 거스르는 것이어서 망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서인불의(庶人不議)' 장에서 "천하에 도가 있..

[정민의 世說新語] [320] 엄이투령 (掩耳偸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춘추시대 진(晉)나라에서 범씨(范氏)가 쫓겨났다. 한 백성이 그 집안의 종을 훔쳐 달아나려 했다. 종이 너무 커서 운반할 수가 없자 그는 종을 깨부숴 옮기려고 망치로 쳤다. 큰 소리가 났다. 그는 남이 이 소리를 듣고 제 것을 빼앗아 갈까 봐 황급히 제 귀를 막았다.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엄이도종(掩耳盜鐘), 또는 엄이투령(掩耳偸鈴)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여씨춘추' '자지(自知)' 편에 나온다. 큰 소리가 나니 엉겁결에 제 귀를 막았다. 제 귀에 안 들리면 남도 못 들을 줄 안 것이다. '여씨춘추'는 글 끝에 "남이 듣는 것을 싫어한 것은 그렇다 쳐도 자기에게 들리는 것조차 싫어한 것은 고약하다"는 평어를 덧붙였다. 자신의 도둑질을 남이 알게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은 알겠..

[정민의 世說新語] [319] 쌍미양상 (雙美兩傷)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당나라 때 배광정(裵光庭)은 염린지(閻麟之)를 심복으로 여겨 무슨 일이든 그의 판단과 감수를 받고서야 글로 썼다. 당시 사람들이 "염린지의 입에 배광정의 손"이라고 말했다. 아이디어는 염린지에게서 나왔고 이를 구체화한 것은 배광정이라는 뜻이었다. 둘이 합쳐 하나가 되자 최고의 조합을 이루었다. 진(晉)나라 때 태숙(太叔) 광(廣)은 변론에 능했고 지우(摯虞)는 글쓰기가 뛰어났다. 조정에서 공론을 펼칠 때 광이 말솜씨를 뽐내며 주장을 세우면 지우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하지만 물러나와서는 글을 지어 광을 비난했다. 그러면 그 글에 대해 광은 또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상대를 헐뜯느라 조용할 날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문해피사(文海披沙)'에 나온다.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