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난자의 한줄로 고전 91

한 삼태기의 흙

爲山九刃 公虧一匱 높은 산을 쌓는 데 있어 한 삼태기의 흙 때문에 그 공을 잃는다 ‘서경’(書經)에서 만날 수 있는 구절이다. 산을 쌓는 데 있어 구인(九인)의 높이에 달하게 됐더라도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면 이제까지의 공은 허사가 되고 만다는 것을 경계한 소공(召公)의 말씀이다. ‘구인’이란 72척이나 되는 높은 산을 말한다. 흙 한 삼태기만 덮으면 끝나는데 왜 흙 나르기를 그만뒀을까? 도중에 포기해 완성을 보지 못한 경우, 그런 후회는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주자(朱子)는 ‘중용’을 읽다가 ‘사람이 한 번 읽어 알면, 나는 백 번을 읽는다. 사람이 열 번 읽어 알면 나는 천 번을 읽는다’는 구절을 읽는 순간 몸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힘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서 나도 뜨거운 감동을 ..

네 가슴속 참 문장을 읽어라

네 가슴속 참 문장을 읽어라 人心(인심)에 有一部眞文章(유일부진문장)이어늘 都被殘編斷簡封錮了(도피잔편단간봉고료)하며 有一部眞鼓吹(유일부진고취)어늘 都被妖歌艶舞湮沒了(도피요가염무인몰료)하나니 學者(학자)는 須掃除外物(수소제외물)하고 直覓本來(직멱본래)하면 재有個眞受用(재유개진수용)하리라. ‘채근담’의 말씀이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한 권의 참 문장이 있건만 옛사람의 하찮은 몇 마디 때문에 모두 다 묻혀 있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한 가락의 참 풍류가 있으되 세속의 요염한 가무(歌舞) 때문에 모두 다 막혀 있다. 그러므로 학자는 모름지기 외물(外物)을 소제(掃除)하고 본래 있는 그 마음을 찾아야 한다. 거기에 비로소 참 보람이 있으리라.” 학자뿐이겠는가. 본래 마음자리로 직입(直入)하는 것은 영성과 통하는 예술..

先聞의 계절

孤客 最先聞 외로운 나그네가 앞서 듣는다. 유우석(劉禹錫) 가을 시의 결구다. 매양 가을이 되면 고객(孤客)인 듯 나의 촉수도 달라진다. ‘문장은 운명의 달(達)함을 미워한다’는 두보의 말대로 명조가 유복하지 못해서인가. 가을 앓이가 심했던 그 시인들의 시를 나는 사랑한다. “가을 바람 어디서 불어오는가/ 쓸쓸히 기러기 떼만 날려 보내네/ 이른 아침 정원에 부는 바람 소리/ 뉘보다도 외로운 나그네가 앞서 듣는다.”(전문) 고독한 시인에게서만 이런 절창의 시가 나온다. 안녹산의 난 중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작은 배, 그때도 가을이었다. “…또 국화는 피어 다시 눈물 지우고 배는 매인 채라. 언제 고향에 돌아가랴….” 그 ‘고주일계(孤舟一繫)’는 두보 자신일 것이었다. 4년을 떠돌다가 고향으로 가는 배..

無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없다

無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첫 구절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대에서 두 남자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뿐인 듯 무의미한 대화를 되풀이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오늘은 오지 않지만, 내일은 꼭 온다는 전갈이 전해지며 제1막이 끝난다. 제2막도 같은 무대, 고목에 잎사귀가 달렸다. 포조는 시력을 잃고 럭키는 벙어리로 변하는데 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의식의 해체과정을 상징한다. 블라디미르 : 내일 목매달기로 하지. (잠시 후)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 오면 어떡하구. 블라디미르 :우린 구원받게 되지. (사이) 자, 떠날까? 에스트라공 : 응, 가세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데 막이..

나를 아는 자, 저 하늘이로다

樂天知命 故不憂 우주와 합일되어 天을 즐기고, 자신의 命을 아나니 근심하지 않는다 주역’ 계사전에 있는 공자의 말씀이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아! 나를 아는 이가 없구나!” 제자인 자공이 “어찌 아는 이가 없으리까?” 하고 여쭈었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허물치 않는다. 아래로 비근한 것부터 배워 위로 천명(天命)을 깨달으니 나를 아는 자, 저 하늘인저!”라고 답했다. 평생이 불우했던 사람, 공자는 제세안민의 꿈을 품고 천하를 주유했으나 실패를 맛본 뒤 “운명의 신은 이렇게 가혹한가?”라고 했다. 그는 나이 오십에 지천명(天知命) 했노라고 술회했다. 그때부터 ‘주역’을 손에 들고 내려놓지 않았다. “운명을 아는 자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나를 아는 자 남을 원망하지 않나니,..

盈虛消長

客亦知夫水與月乎 그대는 저 물과 달을 아는가 소동파의 시 ‘적벽부’의 일구다. 임술년 가을 기망에 소동파는 객과 더불어 배를 띄우고 적벽 아래에서 노닐었다. 맑은 바람은 서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조금 있으니 달이 동산 위에 나타나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배회한다. 흰 이슬은 강 위에 비껴 내리고 물빛은 하늘에 닿아 있다. 이때 어떤 객이 퉁소를 부는데 그 소리가 원망하는 듯 흐느끼는 듯했다. 동파가 “어찌 곡조가 슬프냐?”고 물었다. 객은 적벽강에서 참패한 조조를 떠올리며 “진실로 일세의 영웅인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세상에 붙어 있는 것은 마치 하루살이의 짧은 삶을 천지간에 의탁한 거와 같고, 아득한 창해(滄海)의 좁쌀 한 알이라. 내 일생의 수유함을 슬퍼하고 강산의 다함 ..

본질은 不滅한다

개인은 죽으면서 사라져 버리지만, 본질 자체는 종말을 맞은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죽음에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쇼펜하우어가 ‘본질불멸론’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죽어서도 우리의 본질이 불멸함에 관한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이것은 사후 영혼이 존속한다는 ‘영혼불멸론’과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영혼불멸론의 오류를 이렇게 지적한다. 첫째,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대립시킨 것이 잘못이고 둘째, 인격성으로서의 영혼을 물자체(物自體)의 지경까지 끌어올린 것이 잘못이다. 그러므로 영혼불멸론은 우리의 본질이 불멸하다는 참된 인식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현상계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성이라는 주관적 인식형식에 의존한 것이고, 본체계는 이러한 주관적 인식형성과는 무관하게 있는 것이다. 개인은 죽..

諸相에서 非相을 보면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무릇 있는 모든 相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相이 相 아닌 것으로 보면 곧 如來(眞理)를 보게 되리라 ‘금강경’의 핵심어로서 진여와 실상이 같은 진리임을 여실히 보아야 한다는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말씀이다. “신상(身相)을 가지고 여래(진리)를 볼 수 있겠느냐”고 붓다가 묻자 수보리는 “신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상은 곧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붓다께서 이때 하신 말씀이다. 존재하는 온갖 모습은 다 허망한 것이니 모든 상(相=현상)에서 상 아닌 비상(非相=본체)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고 한 것이다. 여래(如來)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만유의 본체, 법성(法性) 혹은 진리를 말한다. 색신(色身)은..

笏漠無形

笏漠無形 變化無常 홀막무형 변화무상 황홀하고 아득하여 형체가 없고, 끊임없이 변화하여 종잡을 수 없다. ‘장자’ 천하편의 말씀이다. 도란 뭐가 뭔지 모르는 혼돈 상태에서의 황홀, 노자가 말한 ‘황’하고 ‘홀’한 요명의 경지다. 음과 양의 변(變)하고 화(化)하는 과정을 따라 도(道)는 늘 일정한 모양이 없다. 이에 공자는 ‘신무방(神無方), 역무체(易無體)’로써 보충한다. 신(神)은 그 있는 방위(方)가 없고(어디든지 있고), 역(易)은 그 모양(體)이 없다는 의미다. 도를 우주 만물의 근본으로 본 장자는 시공을 초월한 도란 너무도 정교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너무도 광대해 종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대종사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에 이미 있었으면서도 오래되지 않았고 상고..

一陰一陽

一陰一陽之謂道 한번 음 되고 한번 양 되는 것이 도다 공자는 ‘계사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주역은 “역(易)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 음·양)를 낳는다”는 구절에 근거한 음양의 학설이기도 하다. ‘易’이란 해(日)와 달(月)이 결합된 문자로 천도의 운행을 뜻한다. 한번 추우면(陰) 한번 덥고(陽), 한번 밤(陰) 되면 한번 낮(陽) 되는 이 까닭을 도(道)라고 한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으로 변(變)하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화(化)하는 변화의 철학이 주역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역(易)이 아니다. 자연계로부터 인간 사회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보고 모든 사물의 변동을 영허(盈虛), 소장(消長), 흥망성쇠의 과정으로 개괄했다. 소멸하고 자라나며, 가득 차고, 비는 소식영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