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138

[박종인의 땅의 歷史]明 황제가 말차를 금하니 일본이 도자기로 일어서더라

[229] 충남 내포 이야기③/끝 주원장의 용단차 금지령과 나비효과 다도가 김자인이 말차를 시연한다. 김자인이 "쓸데없는 것들의 총체"가 말차 다도라고 할 정도로 말차는 제작부터 마시는 법까지 사치스럽고 까다로웠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9.16 03:00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2대에 왕이 날 자리를 찾아 자기 선친 묘를 이장한 곳이 충남 예산 남연군묘다. 예산은 조선 왕실과 관계가 깊은 땅이었다. 광해군 아들이 유배된 강화도에서 탈출해 달아나려던 목적지도 이곳이었다. 순조 때 추사 김정희가 암행어사로 내포를 샅샅이 훑으며 탐관오리를 적발해냈는데, 그 공덕비와 그가 적발해낸 사또 공덕비도 남아 있다. 그런데 남연군묘 자리에 서 있던 탑에서 송나라 때 떡차, 용단승설차 네 덩이가 발견됐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상투 튼 원숭이들이 중국인을 희롱하는구나”

[230] 혐한론자 소동파와 그를 짝사랑한 한국인 성균관대박물관이 공개한 소동파의 ‘백수산불적사유기(白水山佛跡寺遊記)'. /성균관대학교박물관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9.23 03:00 혐오와 짝사랑 사이 소동파는 북송 때 문장가며 정치가였다. 시는 황정견(黃庭堅)과 함께 ‘황소(黃蘇)’라 불렸고 문장은 구양수(歐陽脩)와 더불어 ‘구소(歐蘇)’라 불렸다. 사(詞, 음률에 얹어 낭송하는 긴 시)는 신기질(辛棄疾)과 함께 ‘소신(蘇辛)’이라 했다. 서예는 북송사대가 중 하나요 그림 또한 유명했다. 송나라는 물론 한자문화권 주변 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고려 지식인들은 소동파를 지극히 좋아했다. 현대 대한민국도 대개 그러하다. 지난주 성균관대박물관이 공개한 소동파 친필 ‘백수산불적사유기(白水山佛跡寺遊..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정비들을 강물에 집어던져야 합니다”

[231] 남한산성 비석 숲에 숨은 복잡다기한 역사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0.07 03:00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남문 입구에 비석 숲이 있다. 산성 안팎에 서 있던 각종 선정비(善政碑)를 모아놓은 곳이다. 디귿 자로 도열해 있는 비석은 모두 30기다. 조용하다. 방문객 동선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 선정비는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에게 백성이 주는 선물이다. 그럴까. 이제 알아보자. 남한산성 남문 입구에 있는 비석 숲. 남한산성과 인연이 있는 고관대작들의 공덕비다. 시대를 풍미한 흥선대원군 선정비가 2기, 다른 의미로 시대를 풍미한 민씨 척족 권력자 민영소의 공덕비도 있다. /박종인 공무원 체크리스트 수령칠사(守令七事)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문명계로 진입하면 사회를 다스리는 규율이 생기고 규..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을 구원할 미국 공주님께 옥과 비단으로 예우를 베푸시라”

[232]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05년 9월 대한제국을 찾은 앨리스 루즈벨트 일행. 앨리스는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딸이다. 왼쪽부터 고든 패덕 주한미국 대리공사, 앨리스 루즈벨트, 약혼자 닉 롱워스. 촬영장소는 미국공사관(현 미 대사관저)이다. /코넬대학교 희귀문서 컬렉션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0.14 03:00 1905년 5월 러일전쟁이 일본 승리로 끝났다. 일본이 ‘조선을 위한 성전(聖戰)’이라는 명분으로 노골적으로 조선 정복욕을 드러낸 전쟁이었다. 1905년 11월 마침내 조선은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에게 넘어갔다. 그때 대한제국 권력자들은 어떤 노력을 했을까. 최고 권력자 고종을 포함해 당시 국운(國運)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

을사조약 직전 고종은 일본서 뇌물 2만원(25억원)을 받았다

[233]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② 뇌물 받은 황제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게 이토 히로부미 대사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을 주었다 -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0.21 03:00 을사조약 때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무엇을 했나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다. 앨리스 루스벨트 일행이 대한제국(이하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05년 9월이었다. 황제 고종은 앨리스를 공주처럼 접대하며 조선 독립을 호소했다. 이미 두 달 전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는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우선권을 맞교환한 이후였다. 그리고 두 달 뒤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강탈’했다. 조선이라는 민족공동체에는 강탈이라는 말이 옳다. 그렇다면 고종에게는? 이제 1..

[박종인의 땅의 歷史]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친 우리 조선인은…”

[234]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③/끝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연설 1907년 7월 5일자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0.28 03:00 만국평화회의가 열흘째 열리고 있던 1907년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고종이 보낸 밀사 3명이 나타났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한성재판소 검사 이준, 그리고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장남 이위종이다. 이위종은 7개 국어에 능했고 다른 두 사람은 못했다. 그래서 만 스무 살인 이위종이 실질적인 대표로 활약했다. 회담 관계자들은 이위종을 왕자(Prince)라고 불렀다. 그 왕자가 취재기자들 앞에서 연설했다. 제목은 ‘조선을 위한 호소(Plea for Korea)’다. 국사교과서에..

[박종인의 땅의 歷史] “예전엔 귀했으나 천하게 됐으니 어찌하겠는가”

[235] 이하응의 파란만장한 삶과 천자(天子)의 나라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살았고, 유폐됐고, 죽은 서울 운현궁.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1.04 03:00 어느 날 흥선군 이하응은 “가야산 가야사 석탑 자리에 선친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1845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을 충청도 예산에 이장하니, 과연 둘째 아들 명복과 손자 척(坧)은 황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들과 아비는 하늘을 함께 짊어지지 못할 원수로 지냈고, 아비는 쓸쓸히 죽었다. 나라도 쓸쓸히 사라졌다. 그 거인(巨人) 석파 이하응이 살아간 파란만장한 삶과 그 아들 손자 대에 끝난 나라를 일별해본다. [235] 이하응의 파란만장한 삶과 천자(天子)의 나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여러분은 세종시대 천문기구 간의대의 종말을 보고 계십니다”

[236] 경복궁 석물의 비밀① 근정전 품계석과 간의대(簡儀臺) 경복궁 정이품 품계석. 세종 때 만든 천문관측기구 간의대 옥석을 뜯어서 만들었다./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1.11 03:00 1395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완공한 경복궁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녔다. 임진왜란 개전 직후인 1592년 4월 선조 일행이 북쪽으로 도주하자 분노한 한성 주민들이 난입해 불태웠다.(1592년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이후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건 공사를 시작할 때까지 경복궁은 공궐위(空闕衛·빈 궁궐 경비대)가 지킬 뿐 왕국 법궁(法宮) 기능은 상실했다. 몰라도 상관없으나 알면 다시 보게 되는, 그 경복궁에 얽힌 비밀 이야기다. 경복궁 경회루.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흠경각 뒤에 있던 해..

[박종인의 땅의 歷史] “상처 난 돌짐승 하나가 주인 없는 궁에 와 있소이다”

[237] 경복궁에 숨은 역사② 구멍 뚫린 천록(天祿)과 굶어 죽은 녹산 사슴 경복궁 영제교 천록 석물. 오른쪽 천록은 등에 구멍이 뚫려 있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1.18 03:00 어느 동종의 기구한 운명 흥선대원군이 시작한 경복궁 중건 공사가 한창이던 1866년 겨울이었다. 그해 2월 8일 인부들이 광화문 서쪽에 방치돼 있던 종 하나를 경복궁 안으로 끌고 와 부쉈다. 세조 때 만든 이 종은 길이가 9자 2치(2m76)에 지름은 6자 5치(1m95) 두께는 9치 7푼(29cm)짜리 대종이었다. 종에는 신숙주가 쓴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녹여 근정전 사방을 지키는 향로와 빗물로부터 처마 아래 서까래를 보호하는 토수(吐首)를 만들고 나머지는 당백전을 만들었다.(국역 ‘..

[박종인의 땅의 歷史] 경복궁 돌담길 가로수마다 사연이 숨었다

[238] 경복궁에 숨은 역사 ③끝 효자로 플라타너스 숲의 정체 좋든싫든 역사를 품은, 경복궁 서쪽 담장 너머 플라타너스 숲.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1.25 03:00 경복궁 약전(略傳) ‘1865년 3월 의정부에서 평석이 발견됐는데,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으면 자손이 끊기니 다시 지어서 보좌를 옮기면 대를 이어 국운이 연장되고 인민이 부유하고 번성하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대원위 합하에게 바치자 궁을 중건하라는 명이 내려왔다.’(‘경복궁영건일기’ 서, 한성부 주부 원세철, 1868년) 그리하여 시작된 경복궁 중건 역사는 1868년 7월 4일 고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문무백관 하례를 받으며 공식 완료됐다. 비가 내리던 그날 판부사 이유원이 고종에게 청했다. “이 법궁을 억만년토록 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