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994

[이규태코너] 모택동 가풍전

[이규태코너] 모택동 가풍전 조선일보 입력 2003.11.14 16:15 중국 푸저우(福州)에서 열리고 있는 마오쩌둥(毛澤東) 가풍(家風) 전시회가 입에 오르고 있다. 그 한 코너에 평소에 썼던 수건이 걸려 있는데 이 누더기 수건을 갈자고 하면 “기우면 더 쓸 수 있다”며 거절했다던 수건이다. 두 딸을 기르는데 먹고, 입고, 사는 것이 여느 백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주석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고, 지금도 아무도 모른다고 큰딸이 고백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깎아준 손자의 연필 모두가 새끼손가락보다 짧은 몽당연필인 것을 보고 숙연했던 기억이 난다. 이 전 대통령이 덮었던 담요 한쪽이 기워져 있음이며, 두어 군데 기운 단벌 내복을 보았을 때도 같은 감회였다. 공자의 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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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동물 오륜

[이규태코너] 동물 오륜 조선일보 입력 2003.11.16 16:49 동물사랑의 상징이요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한국에 와 동물사랑의 전도를 했다. 이를 계기로 출판된 그녀의 저서 ‘생명사랑 십계명’에는 동물에게도 사랑과 슬픔이 있고 정과 의리가 있다는 사례를 모아 동물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도 오지의 도로에서 새끼 원숭이가 차에 치이자 100마리가 넘는 원숭이떼가 몰려나와 교통을 마비시킨 일이며, 서커스단에서 22년간이나 헤어져 있던 코끼리끼리 재회를 기뻐하는 묘사며,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새끼 코끼리를 구하고 자신이 빠지고 마는 사랑의 현장 묘사도 극적이다. 우리나라에도 이 사랑과 슬픔, 그리고 정과 의를 표출한 짐승 오륜(五倫) 이야기는 비일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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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고구려 논쟁

[이규태코너] 고구려 논쟁 조선일보 입력 2003.11.17 17:17 10여년 전 중국 요양(遼陽) 교외에 있는 고구려 유적 백암성(白巖城)을 찾아가기 전에 요양의 중국인 사학자를 찾아갔었다. 왜 그 성을 찾아가느냐고 하기에 한국의 조상나라인 고구려 유적이기에 그렇다 하자, 고구려는 이 지역에 있었던 한 나라였을 뿐 한국과는 아랑곳이 없다면서 강한 불만을 표하던 일이 생각난다. 이 요양의 사학자뿐 아니라 중국 역사학계에서 고구려가 한국의 조상국가가 아니라 중국사에 편입될 나라라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근간에 이 쟁점이 서서히 노출되어 학술논쟁이 예정되고 있다. 고구려가 우리나라인 것은 신라에 통일된 삼국 가운데 하나라는 정치적 시각에서뿐만이 아니다. 고구려의 뿌리를 두고 송서(宋書)는 백제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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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미키마우스 75세

[이규태코너] 미키마우스 75세 조선일보 입력 2003.11.18 17:04 60년대 초만 해도 홍콩 주룽(九龍)반도에서 중국땅을 바라보는것이 관광코스 가운데 하나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측에서 세워놓은 반미(反美) 선전탑이다. 홍콩측에서 중국을 향해 세워놓은 '가구가락(可口可樂)'이라는 코카콜라의 선전탑에 ‘고가고래(苦加苦來)’로 대응하고 있었다. 흥미를 끄는 것은 그 선전탑 아래에 커다란 바구니 같은 것을 걸어놓았기에 뭣이냐고 물었더니 안내인은 쥐덫이라면서 그 안에 분명히 미키마우스를 가둬놓았을 것이라고 했다. 아메리카니즘의 세계화는 코카콜라의 상륙으로부터 시작하여 청바지가 따라오고 그 청바지 해진 바짓자락을 미키마우스가 물고 따라오면 미키마우스의 꼬리에 매어놓은 맥도날드 햄버거가 따라온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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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근정전과 용

[이규태코너] 근정전과 용 조선일보 입력 2003.11.19 16:52 한미수교조약을 맺게 되면서 국기의 필요성이 절박해지자 중국에서 보낸 사신인 마건충(馬建忠)이 그 국기 도안을 이렇게 제안했다. 흰 바탕에 푸른 구름을 아래로 깔고 그 구름 위에 붉은 용을 그려 조선 국기로 삼자는 것이었다. 흰 바탕은 백성을, 푸른 구름은 관원(官員)을, 용은 임금을 나타냄으로써 군·관·민(君官民) 일체의 조화를 표방한 것이라 했다. 이 제안에 조건이 붙었다. 당시 중국 국기에도 용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 용과 구별하기 위해 용발톱을 하나 줄여 네 개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굳이 나라의 상징인 국기에 용을 도입하려 한 것이며 용발톱에 차등을 두려 했음은 중국의 속국임을 표방하려는 저의가 드러나 있음을 알겠다. 이에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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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신선인

조선일보 | 오피니언 [이규태코너] 신선인 입력 2003.11.20 16:50:28 | 수정 2003.11.20 16:50:28 이웃하고 사는 외국사람일수록 곱지 않은 호칭으로 얕부르게 마련이다. 반미 구호가 ‘양키 고홈’이듯이 미국사람을 얕부르는 양키는 본래 허드슨 강변에 살던 화란계 농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독립전쟁 중 영국군이 급모(急募)해서 만든 미국군대를 통칭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주로 농부들을 끌어다 군대를 급조했고 허드슨 강변의 양키가 많았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 말이 미국군대를, 더 나아가 미국을 얕부르는 말로 정착하고 말았다. 양배추를 많이 먹는 독일사람을 양배추라고 부르고, 개구리를 잘 먹는 프랑스사람을 개구리로 얕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카이크는 유대인의 모욕적인 호칭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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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황병기

[이규태코너] 황병기 조선일보 입력 2003.11.21 17:14 위는 짧고 아래는 길게 보이려는 몸매 취향으로 한국의 치마가 세계 유명 패션쇼에서 뜨고 있으며, 발효 음식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김치가 세계 오지에까지 침투하고 있을뿐더러, 유럽을 비롯해 고위도 지방의 난방으로서 온돌이 그 보급 고도(高度)를 낮추어 내리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세계적으로 위상을 재확인할 한국문화는 비일비재하다. 그중 하나가 한국 전통악기인 가야금이다. 가야국의 가실왕(嘉實王)은 “여러 나라 방언이 서로 다르듯이 음색도 같지 않을 터이니 심금에 와닿게 하라” 하며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음색을 동일성화(同一性化)하게 했다. 가야가 망하고 가야금 12곡을 들고 신라에 망명한 우륵은 제자로 하여금 다시 음색을 신라사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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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조각보자기 예찬

[이규태코너] 조각보자기 예찬 조선일보 입력 2003.11.23 18:04 물건을 싸고 밥상이나 덮던 한국 전통 조각보자기가 첨단 감각의 실내 장식물로 재평가되어 지금 일본 각지에 보자기 교실이 개설되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교포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전통문화를 전수시키려 시작된 것이 일본 여인들이 소박한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붐을 이룬 것이다. 외국인들의 눈을 끄는 한국 조각보자기의 세계화 인자(因子)는 형형색색의 조각조각 베 오라기를 첨단 미감각의 밑그림에 이어 댄다는 데 있다. 이를 커튼으로 치면 빛을 받는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장식창이 되고, 벽에 걸면 큐비즘의 태피스트리가 되며, 테이블에 깔면 그에서 풍기는 고졸미(古拙美)가 서양화하는 인테리어의 경박감을 완화시켜 준다. 이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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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파금(巴金)

[이규태코너] 파금(巴金) 조선일보 입력 2003.11.25 16:52 유비(劉備)의 능이 있는 청두(成都)에 중국 근대의 대표적 작가인 바진(巴金)이 태어나 자란 대궐 같은 집이 보존돼 있다. 30명 종들의 시중을 받고 자랐다는 바진은 ‘우리 집은 사막이요, 좁디좁은 조롱이다’라는 그 비인간적 고발로부터 그의 문학은 출발했다. 그리고 노후에 상하이의 공원을 거닐면서 복부가 공백이 된 등신대의 인간상을 보고 ‘나를 조각해 놓은 것 같다’고 한 말은 시사한 바가 크다. 그의 인생 후반 50년 동안 공산 중국에는 문학가니 작가 같은 호칭이 징발되고 없었다. 50년대 이 문학성 작업을 하는 사람을 가수(歌手)라 했는데, 생산 현장에서 얻은 체험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접목시킨 창작을 하고 이 창작물을 다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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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상피(相避)제도

[이규태코너] 상피(相避)제도 조선일보 입력 2003.11.26 16:45 동대문 밖에 우산각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조선조 초 정승 유관(柳寬)이 이 마을에서 살았을 때 일이다. 어느 비가 몹시 오는 날, 방안에 비가 새는지라 유 정승은 우산을 펴고 처자식을 우산 밑으로 끌어들이며 ‘우산 없는 집은 오늘 같은 날 어떻게 지내나’고 걱정했던 데서 얻은 우산각골이다. 우의정이던 유관의 본이름은 관(寬)이 아니라 관(觀)이었다. 그의 아들인 유계문(柳季聞)이 경기 관찰사로 배임받자 완강히 부임을 거부했다. 이유는 관찰사(觀察使)라는 관직명에 아버지 이름이 들어있으니 혈족끼리는 연관 부서에 부임해서는 안 된다는 상피(相避)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초기까지 친족 외족 처족 4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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