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304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42> 斜封官

비스듬할 사(斗-7)봉할 봉(寸-6)벼슬 관(宀-5) 당나라 中宗(중종, 705∼710 재위) 때 ‘斜封官(사봉관)’이라 불리는 관직이 있었다. 중종은 高宗(고종, 649∼683 재위) 李治(이치)의 아들로, 두 번 제위에 올랐다. 684년에 고종을 이어 제위에 올랐으나, 3개월 만에 武則天(무측천)에 의해 폐위되어 한낱 廬陵王(여릉왕)이 되었다. 그 뒤 704년에 재상 張柬之(장간지) 등이 변란을 일으켜 무측천을 퇴위시키고 여릉왕을 다시 복위시켰다. 오랜 유폐 생활 속에서 온갖 치욕과 고초를 겪다가 다시 제위에 오른 중종은 새로 기강을 정립하고 통치에 힘쓰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옷과 편안한 자리에 만족하며 權柄(권병)을 황후 韋氏(위씨)에게 맡겨버렸다. 이에 위후는 딸들인 安樂公主(안락공주)와 長寧公主..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41> 德本財末

덕 덕(彳-12)밑 본(木-1)재물 재(貝-3)끝 말(木-1) 이제 13-2가 이어진다. “德者本也, 財者末也. 外本內末, 爭民施奪. 是故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是故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덕자본야, 재자말야. 외본내말, 쟁민시탈. 시고재취즉민산, 재산즉민취. 시고언패이출자, 역패이입; 화패이입자, 역패이출) “덕은 뿌리요 재물은 우듬지다. 뿌리를 밖으로 하고 우듬지를 안으로 하면, 백성들을 다투게 하고 빼앗는 짓을 가르치게 된다. 이러하므로 재물이 모이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들이 모인다. 이런 까닭에 말이 어그러져서 나가면 또한 어그러진 말이 들어오고, 재물이 어그러져서 들어오면 또한 어그러져서 나간다.” 施(시)는 베풀다, 전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가르침..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40> 秉時養人

잡을 병(禾-3)때 시(日-6)기를 양(食-6)사람 인(人-0) 앞의 글(239회)을 풀이하면 이렇다. “공을 이루는 방법에서는 펴고 굽히는 것이 보배다. 하늘의 지극함을 잊지 말고, 하늘의 법칙을 궁구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일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평소의 모습을 바꾸지 말고, 그 처음을 잃지 말며, 고요히 백성을 지켜보며 때를 살피고, 하늘의 명령을 기다려서 일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음양의 흐름을 잘 지키고 천지의 떳떳함을 따른다’고 한다. 폄과 굽힘은 때를 따라 알맞아야 하고, 숨음과 나타남은 천지의 형세를 따라야 한다. 천지가 형세를 보이고, 성인이 이룬다. (이런 이치를) 작게 쓰는 자는 작은 이익을 얻고, 크게 쓰는 자는 큰 이익을 얻으며, 남김없이 다 쓰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 ‘관자’..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39> 嬴縮爲寶

뻗을 영(女-13)줄어들 축(糸-11)될 위(爪-8)보배 보(宀-17) 본래 上帝(상제)는 은나라 곧 商(상)나라 군주들이 섬기던 지고한 존재였다. 당연히 은나라와 그 군주를 지켜줄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폭군 紂王(주왕)이 포악한 정치를 하면서 상제의 뜻을 거슬렀다. 그 결과 상제는 은나라를 버리고 새롭게 주나라를 선택했다. 이것이 13-1(238회)의 시에 담긴 뜻이다. 물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상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은나라를 대신한 주나라의 군주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天命(천명)’을 내세웠다. 천명은 군주가 백성을 아끼고 위하는 정치를 펴면 상제든 누구든 지고한 존재가 계속해서 지지해줄 것이고, 군주가 사사로이 탐욕을 부리며 그릇된 정치를 편다면 지지를 철회한다는 것이다. 만약..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38> 得國失國

얻을 득(彳-8) 나라 국(囗-8) 잃을 실(大-2) 이제는 13-1이다. “詩云: ‘殷之未喪師, 克配上帝. 儀監于殷, 峻命不易.’ 道得衆則得國, 失衆則失國. 是故君子先愼乎德. 有德此有人, 有人此有土, 有土此有財, 有財此有用.”(시운:‘은지미상사, 극배상제. 의감우은, 준명불이.’ 도득중즉득국, 실중즉실국. 시고군자선신호덕. 유덕차유인, 유인차유토, 유토차유재, 유재차유용.) “시에서 ‘은나라가 민심을 잃지 않았을 적엔 상제를 참 잘 따랐다네.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로 삼을지니, 높고 큰 명은 따르기 쉽지 않다네’라고 노래하였다. 이는 민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민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먼저 삼가며 덕을 갖춘다. 덕을 지니면 곧 사람을 얻고, 사람을 얻으면 곧 땅을 얻으..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37> 信忠嚴禮

미쁠 신(人-7)참될 충(心-4)엄할 엄(口-17)예의 례(示-13) ‘관자’ ‘소문’의 문답은 이렇게 이어진다. “桓公曰: ‘善, 勿已, 如是又何以行之?’ 管仲對曰: ‘質信極忠, 嚴以有禮, 愼此四者, 所以行之也.’ 桓公曰: ‘請聞其說.’ 管仲對曰: ‘信也者, 民信之; 忠也者, 民懷之; 嚴也者, 民畏之; 禮也者, 民美之. 語曰, 澤命不渝, 信也; 非其所欲, 勿施于人, 忠也; 堅中外正, 嚴也; 質信以讓, 禮也.’”(환공왈: ‘선, 물이, 여시우하이행지?’ 관중대왈: ‘질신극충, 엄이유례, 신차사자, 소이행지야.’ 환공왈: ‘청문기설.’ 관중대왈: ‘신야자, 민신지; 충야자, 민회지; 엄야자, 민외지; 예야자, 민미지. 어왈, 택명불투, 신야; 비기소욕, 물시우인, 충야; 견중외정, 엄야; 질신이양, 예야...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36> 治民不在其多

- 다스릴 치(水 - 5)백성 민(氏 - 1)아닐 불(一 - 3)있을 재(土 - 3)그 기(八- 6)많을 다(夕-3) ‘관자’의 ‘小問(소문)’에 나온다. “桓公問治民于管子, 管子對曰: ‘凡牧民者, 必知其疾, 而憂之以德, 勿懼以罪, 勿止以力. 愼此四者, 足以治民也.’ 桓公曰: ‘寡人睹其善也, 何爲其寡也?’ 管仲對曰: ‘夫寡非有國者之患也. 昔者天子中立, 地方千里, 四言者該焉. 何爲其寡也? 夫牧民, 不知其疾則民疾, 不憂以德則民多怨, 懼之以罪則民多詐, 止之以力則往者不反, 來者鷙距. 故聖王之牧民也, 不在其多也.’”(환공문치민우관자, 관자대왈: ‘범목민자, 필지기질, 이우지이덕, 물구이죄, 물지이력. 신차사자, 족이치민야.’ 환공왈: ‘과인도기선야, 하위기과야?’ 관중대왈: ‘부과비유국자지환야. 석자천자중립, 지..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35> 公劉와 太王

- 제후 공(八-2)성 류(刀-13)클 태(大-1)임금 왕(王-0) 맹자가 선왕에게 왜 왕도정치를 실행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선왕은 자신에게 재화를 좋아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며 슬며시 꽁무니를 뺐다. 이쯤에서 물러설 맹자가 아니다. 맹자와 선왕의 문답은 계속 이어진다. “옛날에 公劉(공류)는 재화를 좋아했습니다. ‘시경’ ‘대아’의 에, ‘노적가리에 곳간이러니, 말린 양식을 싸서 전대와 자루에 넣도다. 백성을 화합시켜 나라를 빛내려고 활과 화살을 메고 방패와 창, 도끼, 큰 도끼 지니고 바야흐로 출정하려 하시네’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무는 자에게는 노적가리와 곳간이 있고, 떠나는 자는 꾸러미와 자루가 마련된 뒤에야 비로소 출정할 수 있습니다. 왕께서 재화를 좋아하신다면, 백성들과 함께하십시오.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34> 寡人好貨

- 나 과(宀-11)사람 인(人-0)좋아할 호(女-3)재화 화(貝-4) 아무리 중요한 공간이라 해도 쓸 주인이 없으니, 그냥 둘 필요가 있겠는가? 명당을 헐어버리자는 의견이 나올 법도 하다. 다만, 그런 의견을 낸 자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꼭 주 왕실에서만 천자가 나오란 법이 있는가?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천자의 나라가 되었던 것처럼 또 다른 제후가 천자가 되어 주나라를 代替(대체)하면 되지 않는가? 천자란 왕도를 구현하여 천하 백성을 잘 살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이 시대는 그런 천자를 필요로 하는 때다. 백성들도 가뭄에 단비를 바라듯이 목을 내빼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선왕 당신이 왕도를 펴서 천자가 되어 그 명당에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고 정령을 반포하면 될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33> 明堂과 王道

- 밝을 명(日-4)집 당(土-8)임금 왕(王-0)길 도(辵-9) 전국시대에도 제나라는 소금과 철 등 풍부한 물산의 생산과 유통으로 경제력을 탄탄하게 다졌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며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쪽 진나라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대등한 세력을 유지했다. 그 도성 臨淄(임치)는 전국시대 최대의 도시였다. 특히 威王(위왕)과 宣王(선왕) 때 강국으로 군림했는데, 도성의 성문인 稷門(직문) 곁에 學宮(학궁)을 지어 천하의 선비들을 모아들여서는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 학궁에는 맹자를 비롯해 騶衍(추연)·淳于髠(순우곤)·愼到(신도)·田騈(전변) 등이 출입하며 대부의 녹봉을 받았고, 순자는 그곳에서 세 차례나 祭酒(좨주)를 지냈다. 이렇게 융성하던 제나라도 선왕이 죽은 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