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994

[이규태 코너] 스위스 이미지

[이규태 코너] 스위스 이미지 조선일보 입력 2002.03.17 19:37 스위스ㅡ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과와 시계와 영세중립국이다. 가장 오래된 석기시대의 사과 씨앗이 스위스의 호숫가에서 발견돼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놈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놓고 활을 쏴야 했던 사냥꾼 윌리엄 텔의 사과는 악한 권력자의 횡포를 증오하고 맞서 싸우는 자유와 정의와 용기의 상징인 것이다. 스위스에서는 마음의 약속을 다질 때 사과를 잘라 먹는다던데 바로 이 윌리엄 텔의 사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겨울에 스위스 시골을 여행하다보면 양지바른 볕받이에 남녀노소 마을 사람들이 뜨개질하며 유유자적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죽어가는 스위스 사람들의 손재간을 살리고 보존하려는 수단이라고 들었다. 곧 스위스를 지탱하는 것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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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유미리의 외조부

[이규태 코너] 유미리의 외조부 조선일보 입력 2002.03.18 19:25 일본의 교포 여류작가 유미리씨가 주말 서울에서 있었던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했다. 나약한 체질로 중도에서 포기할 것이라는 예상이나 무릎 관절의 통증 그리고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완주를 해냈다. 뮌헨 올림픽 때 마라톤에서 우승한 무명선수 쇼터가 한 말 「마라톤은 체력 대(對) 심지(心志)의 비율이 40대60」이란 것을 떠오르게 하는 완주다. 유미리를 완주시킨 심지가 뭣일까. 일제 때 양임득(梁任得)이라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장거리 선수가 있었다. 손기정옹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이듬해에 있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육상경기대회 5000미터 장거리에서 15분28초4로 신기록을 세운 유미리씨의 외할아버지다. 12회 도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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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南韓 소나무

[이규태 코너] 南韓 소나무 조선일보 입력 2002.03.19 19:57 근년에 한국 산들을 자주 오르다보면 소나무들이 갈색으로 시들어가고 있음을 완연히 느낄 수 있다. 추위 속에 잘 자라는 이 침엽수 대신 더위 속에 잘 자라는 활엽수가 기승을 부리고 있음을 실감할 수가 있다. 때마침 한국환경정책연구원에서 지구온난화에 따른 한반도의 식생변화 예상도를 작성·발표했는데, 앞으로 100년 뒤인 2100년에는 한반도의 기온이 1990년보다 2.08도 올라 소나무는 10분의 1로 줄어 태백산·지리산 그리고 설악산 극히 일부 지역에 조금 남아서 자랄 뿐, 남한 전역에서 소멸될 것으로 예상했다. 소나무의 소멸은 한국이나 한국인의 정체성 소멸로 직결되어 불행한 미래를 연상케 하고 있다. 한국인은 태어날 때 「내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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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酩酊 러시아

[이규태 코너] 酩酊 러시아 조선일보 입력 2002.03.20 20:22 러시아에서 술로 숨진 사람이 지난해 4만7000명으로 과음이 국가 안보 문제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알콜 중독자 수는 어른 5인당 한 사람꼴이고ㅡ. 러시아에서는 제정시대부터 금주령, 전매제, 판매시간 제한 등 별의별 시책을 다 써왔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술을 못 구하면 메틸 알콜은 고사하고 석유 휘발유까지 마셔 눈이 멀고 죽는 이가 속출한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블라디미르라는 황제가 회교로 러시아의 국교를 바꾸고자 했는데 계율로 술을 금하고 있는지라 러시아 사람에게 술없는 신앙을 갖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러시아 정교로 국교를 삼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교 이전의 러시아 종교는 회교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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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황사 天心觀

[이규태 코너] 황사 天心觀 조선일보 입력 2002.03.21 19:15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 불어오는 모랫바람을 황사 또는 황진(黃塵)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황토(黃土)라고 한다. 바람속의 미진이 먼지나 모래로 비유하기에는 너무 크고 모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황사를 나르는 바람도 칼날로 에이듯하다 하여 괄풍(刮風)이라 부른다. 아마도 사막의 흙을 칼로 에이듯 파서 날린다 해서 얻은 이름일 것이다. 탐험가 헤딘의 「고비사막 탐험기」에 이 황사를 당한 대목이 나온다. 서풍을 타고 밀려드는 이 모랫바람은 마치 검은 벽이 밀려드는 것 같았으며 그 속을 걷는다는 것은 탁류속을 거슬러 가는 듯한 압력을 받았으며 몸을 30도쯤 뒤로 젖혀 저항을 주려 해야 겨우 한 발자국씩 뗄 수 있었다 했다. 텐트는 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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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로얄 증후군

[이규태 코너] 로얄 증후군 조선일보 입력 2002.03.22 19:56 지난 54년 동안 한국인이 특허청에 출원한 상표로서 「로얄」이 91건으로 가장 많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상표로서 선호한다는 것은 그런 이름을 붙이면 잘 사간다는 것이 된다. 비단 '로얄'뿐 아니라 각종 접객업소의 이름이나 자동차·술·시계·냉장고·전축 등 내구소비재 상표로서 선호되는 이름도 골드·수퍼·디럭스·프레지던트·체어맨· 프린스·퀸·살롱·엠파이어·팰리스·거버너·그랜드 등 '로얄'과 같은 최고성 상표가 상식이다. 왜 한국인은 그토록 최고를 좋아하는 것일까. 20세기 후반 들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부터 최고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신원이나 재력을 모르는 사람끼리 접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보다 고급품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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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안녕 유고슬라비아

[이규태 코너] 안녕 유고슬라비아 조선일보 입력 2002.03.24 20:21 잡다한 인종과 종교와 문화를 삭혀서 일군 미국을 「위대한 용광로」로 비유하지만 잡다한 야채를 마요네즈로 버무려놓은 샐러드로 비하하기도 한다. 마요네즈를 씻어버리면 모든 야채가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미국이 야채 샐러드라면 유고슬라비아는 한국음료인 화채랄 수 있다. 다섯가지 맛을 내는 오미자 우린 붉은 국물에 수박·오이·배·사과·앵두·잣ㅡ 가진 잡동사니를 띄워 만든 것이 화채다. 6개 공화국과 2개 자치주로 연방을 이루고 20여개 인종이 잡거하며 말도 8개어가 통용되고 있으며 종교도 희랍정교·이슬람교·가톨릭·프로테스탄트가 할거, 찢고 발기고 성한 날이 없는 갈등의 역사를 이어 온 유고슬라비아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후 티토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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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늑대와 어린이

[이규태 코너] 늑대와 어린이 조선일보 입력 2002.03.25 19:58 부평의 한 백화점 뜰에서 늑대 한 마리와 어린이들이 얼려노는 보도사진은 연만한 사람들에게 금석지감을 불금케 한다. 반 세기 전만해도 산골에서는 여자 목소리로 어린이를 유인, 잡아먹길 수없이 했던 늑대다. 음흉한 심보를 낭심(狼心)이라 하고 당황하는 꼴을 낭패(狼狽)라 하며 많이 흘린 피를 낭자(狼藉)라 했듯이 늑대 이미지는 흉악·탐욕·교활·잔인 일변도였다. 반 세기 만에 그 흉악한 늑대 이미지가 징발한 셈이다. 따지고 보면 늑대는 본이 흉악하지 않았다. 늑대 낭(狼)자를 풀어보면 「犬+良」으로 좋은 짐승이다. 어릴 적 인근 산에 늑대가 출몰하면 할애비 늑대니 손자 늑대니 알았을 만큼 조부손(祖父孫) 3대가 동당(同堂)하고 늙은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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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쿠르드 족

[이규태 코너] 쿠르드 족 조선일보 입력 2002.03.26 20:27 우리에게도 친근한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미인'이라는 게 있다. 산골 마을에 한 젊은 학생이, 파리 들끓는 지저분한 마차 안의 노동자들 틈에 끼여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그 마차에 희랍조각에 나오는 것 같은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가 올라탄다. 이를 본 일동은 하나 둘씩 말을 잃고 조용해진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그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 잘 모르지만, 그것은 훨씬 이전에 이 세상에서 없어진 것 같은ㅡ」 그런 허전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고갯마루에서 이 아가씨가 내렸고, 그러자 한숨소리가 새어나왔으며, 채찍잡이는 돌아보며 "좋은 여자구먼. 저 아르메니아 아가씨는…" 하고 한숨을 쉰다. 구약성서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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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대통령 평가

[이규태 코너] 대통령 평가 조선일보 입력 2002.03.27 20:41 파란 많았던 아바마마 태종(太宗)의 정치 행적을 적은 실록(實錄)이 완성되자 세종은 그 실록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아뢰기를 「실록에 기재된 것은 후세에 전하여 정사에 도움이 되게 하는 사실들입니다. 전하가 보시더라도 상왕을 위해 고치지는 못할 것이요, 지금 한번 보기를 시작하면 후세 임금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니 사관(史官)이 의구심을 가져 그 직책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했다. 이에 세종이 그말을 좇았던 것이다. 조선 왕조에도 임금이 바뀌면 전 임금의 정치 행적을 사실대로 적어 잘잘못을 가려 후세에 본보기로 삼는 평가성 작업이 따랐던 것이다. 그 평가작업을 두고 사실을 왜곡하는 권력의 힘이 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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