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994

[이규태 코너] 다시「파리의 등불ㅡ」

조선일보 | 오피니언 [이규태 코너] 다시「파리의 등불ㅡ」 입력 2002.04.21 18:47:20 전라도 순창에 신경준(申景濬)이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신숙주의 형제인 신말주(申末舟)의 후예다. 각종 수레를 개발하여 교통과 전쟁에 이용해야 한다는 이분의 상소문 속에 하늘을 나는 날틀이 나온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포위된 진주성 안에 갇혀있던 재간있는 어느 한 분이 하늘을 나는 수레를 만들어 가족과 친지를 성밖으로 탈출시켰는데 그 수레의 성능에 대해 30여리 날았다 했으니 12㎞ 난 것이 된다. 비행기를 발명했다는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 1호기는 1903년 말에 노스캐롤라이나의 사막에서 36㎞ 날았으니 그 수백년 전의 한국비행기의 겨우 3배를 더 난 셈이다. 다시 그 4년 후 플라이어 3호기가 40㎞ ..

이규태 코너 2022.11.26

[이규태 코너] 책

[이규태 코너] 책 조선일보 입력 2002.04.22 19:15 천자문(千字文) 배울 나이가 되면 아버지는 글동냥(乞筆)의 기나긴 여로를 떠난다. 대과(大科)는 못되더라도 향시(鄕試)를 거친 진사 생원을 찾아다니며 넉자씩으로 된 천자문 다섯줄씩을 친필로 써달라고 동냥하며 50여 집을 찾아 헤맸으니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글을 써준 선비는 이 아이의 글 아버지가 되어 서양의 대부(代父)처럼 평생 인연을 갖는다. 책 한 권 되기가 그만큼 어렵고 정성과 정신이 들어가 있으며, 아무리 자질이 못된 아이일망정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서(古書)를 접하다보면 책장 넘기는 모서리가 종잇발이 서고 닳아 새 종이로 이어놓은 것을 이따금 볼 수 있다. 이를 보장(補帳)이라 하는데 맨 끝장에 보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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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미국속의 이스라엘

[이규태 코너] 미국속의 이스라엘 조선일보 입력 2002.04.23 19:24 애틀랜타에서는 봄마다 세계 굴지의 오페라를 초빙하여 공연을 갖는데 그 전야에 에드몬트 클럽 주최의 대무도회를 열어왔다. 이 클럽은 영국계 신교도들로 미국 속의 귀족을 자처하는 와스프(WASP)의 모임으로 선민의식이 대단하다. 의당히 오페라 출연 가수들을 초대하는 것이 관례인데, 연전에 오페라 「토스카」의 주인공 레온타인 프라이스가 초대에서 제외당한 일이 있었다. 프라이스가 유태인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런 차별을 받고 공연할 수 없다 하여 철수했는데 미국에서 유태인의 위상을 가늠케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유태인 파워는 막강하다. 유태인이 500명 이상 있는 나라가 세상에 70개국에 이르는데, 그 중 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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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보쌈질

[이규태 코너] 보쌈질 조선일보 입력 2002.04.24 18:27 전근대적 결혼풍습인 약탈혼(掠奪婚)이 중국과 러시아 접경에 있는 키르기스스탄에 관행으로 남아있으며 몸값을 두고 갈등이 생기지 않는 한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는 특파원의 보도가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엉덩이에는 한국사람처럼 몽골반점이 있고 돌잔치며 삼일장 등 유사한 통과의례와 풍습을 지녀 문화적으로 같은 뿌리를 추정케 하는 민족이다. 과부나 처녀·총각을 약탈할 때 커다란 보로 싸매고 온다 하여 약탈혼을 보쌈질이라 하는데 20세기 초만 해도 과부 보쌈은 흔히 있었던 우리나라이기에 관심이 쏠린다. 정조때 문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보면 노수신(盧守愼)이 남쪽 섬에 유배돼 있을 때 사나이들이 작당, 폭력으로 처녀를 약탈하는 풍속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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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들기름

[이규태 코너] 들기름 조선일보 입력 2002.04.25 19:23 혓바닥에는 각기 다른 맛을 감지하는 미역(味域)이 따로따로 발달한다. 한데 외국사람들에게는 퇴화하거나 미개한데 한국사람에게 별나게 발달한 미역이 두 군데 있다. 그 하나는 발효음식에서 나는 삭은 맛을 감지하는 미역이요, 다른 하나는 기름에서 나는 고소한 맛을 감지하는 미역이다. 고소하다는 말 자체를 가진 나라도 드물다. 영어에서 고소하다는 말은 깨맛같다 하고, 일본에서도 고마아지 곧 깨맛같다 하거나 간바시ㅡ향기롭다고 할 뿐 독립된 말이 없다. 말이 없다는 것은 그 맛을 둔 문화가 미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기적으로 닥치는 기근과 해마다 넘어야 하는 보릿고개 때문인지 우리 조상만큼 야생의 풀을 먹어온 민족도 드물다. 이렇다 할 맛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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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고려 靑磁

[이규태 코너] 고려 靑磁 조선일보 입력 2002.04.26 19:43 고려자기에서 나는 청색을 비색(翡色)이라 한다. 중국 청자의 푸른색과 차별화하기 위해 얻은 이름이다. 미술사가 최순우씨는 「고려인의 근심과 염원과 애환을 섞은 듯한 푸른색, 뽐낼 줄도 깔볼 줄도 모르는ㅡ 그리고 때로는 미소짓고 때로는 속삭이듯, 때로는 상념에 묻히듯한 고독한 색」으로 비색을 보았다. 그래서 비색은 청자의 본향인 송나라에서도 색의 일종이 아니라 어느 지경의 마음이 녹아흐르지 않으면 못내는 색으로 소문나 있었다. 송나라 학자 태평노인의 「유중금(釉中錦)」에 천하제일의 유약 가운데 하나로 비색을 들었으며 중국사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도 청자의 아름다움에 홀리고 있음을 본다.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인 오다노부나가(織田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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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논

[이규태 코너] 논 조선일보 입력 2002.04.28 18:54 한말 헌종(憲宗) 때 항간에 다음과 같은 동요가 번졌었다. 「당당홍의(堂堂紅衣) 정초립(鄭草笠)이 /계수나무 능장 짚고 /건양재(建陽峙)로 넘나든다 /반달이냐 왼달이냐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헌종이 반월이라는 미색에 혹하여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건양재에 주막을 지어 반월을 살림차려 주고 사복으로 드나들며 국사를 소홀히 한 데 대한 반감의 동요인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한 수단으로 그릇돼가는 나랏일에 여론이 결집되면 이같은 동요를 방방곡곡에 흘려 공감대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이 동요가 백성들에게 널리 깊게 파고들게 하고자 「아나 농부야 말들어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네가 무슨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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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베이징 외국공관

[이규태 코너] 베이징 외국공관 조선일보 입력 2002.04.29 20:00 정치범이나 과실범인이 복수나 관헌의 추적을 피해 특정 지역에 들어가면 더 이상 추적하지 못하는 특구(特區)는 구약성서에도 여섯 차례나 나온다. 이를 아지르라 했는데 독일에는 18세기까지 이 도망자 보호특구가 있었다. 유럽에 산재해 있던 아지르들은 공법(公法)이 정착하면서 사라졌는데 이웃나라와 교역하는 시장특구로 탈바꿈해서 발달했다. 삼한시대의 마한에도 별읍(別邑)이라는 아지르가 있었다. 50여개 나라들이 이웃하고 있었는데 그 경계 부근에 솟대(蘇塗)라는 기다란 장대를 세우고 북과 방울을 달아 별읍 지역을 표시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쫓기는 도망자가 이 별읍에 들면 더 이상 추적하지 못했다고 '삼국지(三國志)' 마한전에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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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흉노(匈奴)

[이규태 코너] 흉노(匈奴) 조선일보 입력 2002.04.30 19:50 우주여행에서 오로지 볼 수 있는 지구상의 인조물이 만리장성이다. 그 장성을 쌓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다. 서쪽으로 달려가 로마제국을 멸망케 하는 요인을 이룬 것도 흉노요, 얼음으로 연륙된 알래스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으로 정착한 것도 흉노라는 설이 있는 바람의 민족이다. 국립 민족 박물관은 몽골 아카데미와 유대하여 아르강변의 흉노 유적지를 발굴, 그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고대 신라문화와 유사한 점이 많아 그 문화전파에 각광을 대보고자 한다. 이미 신라 고분 출토물에서 신라 초기 지배층이 원주민 아닌 북방 기마 민족이라는 심증을 굳혔었다. 출토물의 거의 다가 마구(馬具)요, 얼마전에도 기마상이 출토..

이규태 코너 2022.11.25

[이규태 코너] ‘밥퍼’ 운동

[이규태 코너] ‘밥퍼’ 운동 조선일보 입력 2002.05.01 18:53 노숙자 노인 걸인 등 소외받은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어주는 청량리 역전의 밥퍼운동에 외국인 교수를 비롯, 국적을 초월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어 사회의 아랫목 같은 훈김을 느끼게 한다. 이 아랫목은 옛날에도 없지 않았다. 주로 한양 사대문 사소문 앞이 노숙자의 잠자리인데 그 중 동대문과 남대문 앞은 일거리 찾아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수백명을 헤아렸다. 북촌 양반들이나 황토마루의 중인들 가문에서는 이 성문 앞을 찾아다니며 노숙자들에게 밥 보시를 했다. 밥솥과 국솥을 숯불로 덥히게끔 된 밥수레를 끌고 와 「개천(청계천)변 천녕(川寧)현씨(玄氏) 밥보시요!」 「교사동 김참판댁 밥보시요!」 하며 밥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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