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99

[차현진의 돈과 세상] [58] 베니스의 정치인

[차현진의 돈과 세상] [58] 베니스의 정치인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02.16 00:00 과거 이탈리아 베네치아(영어명 베니스)는 유럽 해운의 중심지였다.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의 황금해안, 동쪽으로는 흑해까지 항로가 이어졌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주인공 안토니오의 배가 향하던 곳은 북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다. 하지만 수심이 얕기로 유명한 도버해협을 지나다가 모래톱에 걸려 좌초하고, 안토니오는 빚에 쫓긴다. 베네치아의 상인 안토니오는 파산했지만, 상인의 도시 베네치아는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14세기에 흑사병을 만나 인구가 40%나 줄었다. 그러자 콧대 높고 배타적이기로 유명했던 베네치아 사람들이 문호를 개방했다. 베네치아를 다시 살린 것은 이민 정책이었다. 베네치아..

[차현진의 돈과 세상] [57] 다정이 냉정보다 힘이 세다

[차현진의 돈과 세상] [57] 다정이 냉정보다 힘이 세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02.09 00:02 맬서스의 인구론이 세상에 미친 영향은 크다. 문필가 칼라일에게는 ‘경제학은 우울한 과학’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과학자 찰스 다윈과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에게는 ‘적자생존’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차 이름으로 더 유명한 얼 그레이 총리가 1834년 빈민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잉여 인간’, 즉 노숙자들을 작업터에 구금시킨 뒤 알량한 식사와 함께 극심한 노동을 강제할 수 있는 법이다. 식량 부족의 운명을 타고난 인류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공짜로 자비를 베풀 여유가 없다는, 강박관념의 산물이었다. 영국이 졸지에 인정머리 없는 사회로 변했다. 그러자 찰스 디킨스가 반기를 들었다. 소설..

[설날에 읽는 차현진의 돈과 세상] 국제사회의 오징어게임

[설날에 읽는 차현진의 돈과 세상] 국제사회의 오징어게임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02.01 00:00 우리나라의 ‘왕따’에 해당하는 일본말은 ‘이지메’다. 그 말은 1970년대에 등장했지만, 과거 농경시대에도 무라하치부(村八分)라는 나쁜 관습이 있었다. 공동체의 규칙이나 질서를 어긴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해서 외톨이로 만드는 벌칙이다. 무라하치부 통보를 받으면, 집단 협업이 필요한 농사일에서 이웃의 도움을 전혀 얻지 못하게 되어 생존까지 위협받았다. 왕따, 이지메, 무라하치부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 사회에서도 따돌림 받는 국가는 생존하기 힘들다. 지금 북한이 그러하다.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에 대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과의 석탄·철광석 거래를 금지하고 금융거래까지 차단했다..

[차현진의 돈과 세상] [56] 비판을 싫어하면 사고 난다

[차현진의 돈과 세상] [56] 비판을 싫어하면 사고 난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01.26 00:00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비극은 지금도 생생하다. 발사한 지 73초 후 공중에서 터지면서 승무원 7명이 모두 하늘의 불꽃이 되었다. TV를 보던 세계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사고 직후 언론은 백악관에 책임을 돌렸다. 레이건 대통령의 의회 국정 연설에 앞서 멋진 쇼를 펼치려고 발사 일정을 무리하게 앞당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인은 지극히 사소한 데 있었다. 그 사고에 이용된 보조 로켓은 외부에서 제작되었는데, 그것을 만든 회사가 제작 방식을 바꿨다. 여러 부품을 잇는 부위에 신소재 고무 패킹을 썼다. 그런데 발사 모의 실험 24회 중 7회에 걸쳐 그 접합 부위에서 경고등이 들어왔다. 전부 섭씨..

[차현진의 돈과 세상] [55] 싸우면서 건설했다

[차현진의 돈과 세상] [55] 싸우면서 건설했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01.19 00:03 1962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기간 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8.3%를 기록하여 목표인 7.1%를 훌쩍 뛰어넘었다. 남북한의 경제력이 그때 뒤집혔다. 1967년 시작된 제2차 계획은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1964년 베트남 파병에 이어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상당한 외자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경공업을 뛰어넘어 중공업까지 지향했고, 거기 맞춰 현대자동차(1967년 12월)와 포항제철(1968년 4월)이 설립되었다. 그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1.5%에 이르러 다섯 번의 개발계획 중 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체제경..

[차현진의 돈과 세상] [54] 그때는 맞았지만

[차현진의 돈과 세상] [54] 그때는 맞았지만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01.12 00:00 과거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 안에서 골목대장 역할을 하는 데 만족했다. 이른바 먼로주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대륙 밖의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렀다. 그것은 세계 최강국이 겪는 왕관의 무게였다. 닉슨 대통령은 그 무게를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 소련까지 개입하려고 하자 북극 근처에서 공군기로 군사 시위를 벌였다. 소련을 향해 ‘두 전쟁’도 가능하다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럴 능력은 없었다. 소련을 향한 힘자랑은 슬그머니 중단되었다. 러시아가 미국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다. 흑해 주변을 비행 중이던 미국 정찰기에 러시아가 최근 총격을 가했다. 우크라이..

[차현진의 돈과 세상] [53] 직장 생활은 마음먹기 나름

[차현진의 돈과 세상] [53] 직장 생활은 마음먹기 나름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01.05 00:00 영국 언론인 월터 배젓은 “은행원은 놀고먹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쁘면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놀고먹지는 않더라도 은행원의 일이 단조롭기는 하다.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이다. 시인 T. S. 엘리엇도 은행 생활이 너무 단조롭다고 느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돈이 필요한 나머지 로이드은행에 취직했다. 그러자 그의 친구들이 돈을 모아 그를 탈출시켰다. T. S. 엘리엇에게 은행이란, 문학성을 말라 죽게 만드는 ‘황무지’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케네스 그레이엄은 월급을 많이 주는 영란은행을 떠나지 않았다. 자기의 글솜씨도 숨겼다. 총재 비서실장으로 정년퇴직한 ..

[차현진의 돈과 세상] [52] 박정희와 경제학자의 대결

[차현진의 돈과 세상] [52] 박정희와 경제학자의 대결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1.12.29 00:00 공자(孔子)는 현실 참여를 갈망했다. 그가 전국을 주유(周遊)했던 것은, 자기 뜻을 세상에 펼치기 위함이었다. 현실 개조다. 그런 공자의 눈으로 보자면, 영국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은 한심한 사람이다. 그녀는 일평생 대안 없는 비판만 했다. 학자는 현실을 진단하고 비판하는 사람이고, 현실을 바꾸는 것은 정치가의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순수한 생각을 하다 보니 공산국가들의 행사에 동원되는 선전 도구로 전락했다. 로빈슨은 근대 경제학의 산실인 케임브리지대학교 최초의 여성 경제학 교수이자 케인스 학파의 선봉이었다. 미시와 거시 경제학 양쪽에서 독보적 업적이 있다. 그녀의 상품성을 알아본 ..

[차현진의 돈과 세상] (51) 대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차현진의 돈과 세상] (51) 대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1.12.22 00:00 우리나라에 ‘스카이 캐슬’이 있다면, 중국에는 ‘샤오서더(小舍得)’가 있다.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생들에게 고등학교 수준의 어려운 공부를 강요하는, 중국의 교육 현실을 풍자한 TV 드라마다. 어린아이들을 과중한 과외 공부로 내모는 일을 중국인들은 ‘지와(鷄娃)’라고 한다. 병아리의 피를 뽑는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는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았다. 소위 ‘명문 중학교’ 입학을 위해서 병아리의 피를 뽑는 듯한, 아동 학대 수준의 과외 공부가 있었다. 그것이 너무 심각해지자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추첨 제도가 시작되었다. ‘명문 중학교’를 향한 입시 경쟁은 6·25전쟁이 끝난 뒤 베이..

[차현진의 돈과 세상] [50] 어음과 디지털금융

[차현진의 돈과 세상] [50] 어음과 디지털금융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1.12.15 00:00 어음은 순우리말이다. 어험(魚驗) 또는 어음(於音)이라고 적기도 했지만, 베다(자르다)는 뜻의 ‘엏’에서 나온 순우리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 장의 채무 증서를 반으로 잘라 채권자와 채무자가 한쪽씩 나눠 가진 관습에서 ‘엏’이라는 어원과 이어졌다. 에누리의 ‘에(에다)’와 뿌리가 같다. 일본에서는 어음을 데가다(手形)라고 부른다. 채무자가 손바닥에 먹을 묻혀 어음 뒤에 손 모양(手形)을 남긴 때문이다. 둘로 잘라 나눠 갖는 한국의 ‘엏’이 융통(약속)어음이라면, 서양식 배서 절차가 강조된 데가다는 상업어음이다. 상업어음은 끊임없이 유통되는 반면, 융통어음은 그렇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