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 587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22> 천 단위와 만 단위 ; 글로벌 스탠다드?

초등학교 산수 시간에 배운 유용한 지식이 있다. 선생님께선 큰 숫자를 읽을 때 네 자리씩 콤마를 찍어서 만-억-조 순서대로 거꾸로 읽으면 된다고 하셨다. 이후로 나는 가끔 대기업들의 재무상태표에서 큰 숫자를 만나면 딱 그렇게 했다. 가령 35,788,965,428,691원과 같이 세 자리마다 콤마로 끊은 숫자를 보면 네 자리씩 콤마를 끊었다. 덕분에 35,7889,6542,8691은 35조 7889억 6542만 8691원으로 쉽게 읽었다. 세 자리씩 천 단위로 끊어 읽는 것은 서양식이다. 미국인들은 35,788,965,428,691을 35 Trillion 7 Hundred 88 Billion 9 Hundred 65 Million 4 Hundred 28 Thousand 6 Hundred 91으로 읽는다. ..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21> 억장과 억장 ; 억의 뜻

나 어릴 적만 해도 백만장자는 엄청난 거부였다. 1970년대에 ‘육백만 달러의 사나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다. 그 만큼 엄청난 돈을 들여 재활시킨 남자라는 뜻이었다. 백만장자는 최소 일백만 달러를 가진 부자다. 10억 원 정도다. 6백만 달러라고 해봐야 100억 원이 안된다. 물론 큰 돈이다. 하지만 웬만한 아파트 한 채가 10억원이 넘는 요즘 시대에 백만장자는 큰 부자가 아니다. 이제는 억만장자가 부자다. ‘Six Million Dollar Man’은 ‘Six Billion Dollar Man’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억만장자(Billionaire)는 10억 달러를 가진 부자다. 우리 돈으로 대략 1조 원이다. 그냥 부자가 아니라 거부다. 연매출 1조 원도 큰 회사인데 개인 재산이 1조 원이라니? ..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20> 많과 만 ; 드먼 10,000

적다(少)의 반대말인 많다(多)는 순우리말인가? 한자에서 온 우리말일까? 필자는 우리말에 억지로 한자를 끼워다 맞추는 한자부회(漢字附會)를 꺼린다. 그러니 견강부회(牽强附會)하듯 한자부회하여 ‘많다’가 한자에서 온 우리말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나름 그럴 만한 일리가 있어서 하는 판단이다. 滋味(자미)에서 온 재미, 종용(從容)에서 온 조용, 침채(沈菜)에서 온 김치, 간난(艱難)에서 온 가난, 작난(作亂)에서 온 장난처럼 많다도 한자에서 유래한 낱말일 수 있다. 우리말이 한자에서 유래했다고 우리말이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건 억지다. 가령 김치가 한자어 침채에서 왔다고 김치가 중국 것이라는 주장은 도무지 말이 안된다. 김치는 한국 음식이다. 단지 우리말 낱말이 중국 한자를 빌려 썼다. 신라시대 이..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19> M과 천 : 다가올 새 1000년?

왕년에 X세대가 있었다. 미지수처럼 도무지 그 특징을 알 수 없다는, 1970년 무렵에 태어난 세대다. 그 다음에 Y세대가 있었다. 이어 서 Z세대다. Z는 N세대의 N이 네티즌을 뜻하는 것처럼 특정한 뜻이 있는 이니셜이 아니다. 그냥 X와 Y 다음의 신세대다. 요즘은 MZ세대라 불린다. 새로운 천년(Millennium)인 2001년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엄 Z세대다. 1960년에 태어나 베이비붐 세대인 필자는 MZ세대들은 물론 태어나자마자 마스크를 끼고 사는 코로나 세대들과 함께 기원후 세 번째에 해당하는 천년을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또 무슨 세대가 등장할까. ‘어느 천년에?’란 말은 어찌 하(何)를 쓰는 하세월(何歲月)과 뜻이 같다. 그 시간이 너무 길어 가능성 없이 요원(遙遠)하다는 뜻이다. 천년약..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18> 온과 백 ; 온조와 백제

유대인 모세는 BC 13세기에 ‘모세5경’을,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는 BC 5세기에 ‘히스토리아’를, 한나라 때 사마천은 BC 1세기에 ‘사기’를 썼다. 이보다 1000~2000여 년 늦은 1145년에 고려의 김부식은 우리나라 최초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여기에 백제라는 나라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기록돼 있다. 원래는 열 명의 신하(十臣)가 보좌하여 십제(十濟)라 했는데 나중에 백성(百姓)들이 더 많이 따라와서 백제(百濟)로 바꾸었단다. 아무리 삼국사기가 정사라고 하지만 궁금한 게 있다. 과연 백제라는 국명을 당시에 그렇게 한자로 지었을까.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들 온조가 왕권 싸움을 피해 한강 남쪽(河南) 유역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한 때는 BC 18년이다. 1163년 후 삼국사기가 편찬..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17> 서른에서 아흔까지 ; 흔 숫자들

태초에 가장 큰 숫자는? 인류학 지식에 의존하기 전에 우선 머릿속에 입력된 스몰데이터를 돌리고 굴려서 원시적 상상력을 동원하면 얼추 답할 수 있다. 유인원(類人猿)으로부터 분화된 인간의 종류인 인류(人類)가 약 200만 년 전에 나타나고 약 20만 년 전부터 슬기로운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활동할 때까지 숫자 개념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애를 조금 낳으면 적고 그 이상 낳으면 많고, 사냥감이나 열매가 부족하면 적고, 풍족하면 그냥 많다고 여겼을 것이다. 다만 적고 많음을 따지는데 다른 동물들보다는 분별력이 살짝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3만~4만 년 전부터 등장한 슬기롭고 슬기로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비로소 하나 둘 셋 등의 숫자 개념을 따졌을 것이다. 이들 현생인류는 적고 많은 다소(多少)를 숫자..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16> 스물과 스몰 : 20세 때

잘 쓰이지 않는 숫자로 ‘卄’이라는 한자가 있다. 스물 입 자다. 일십의 두 배인 이십을 ‘입’이라고 발음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같다. 열 십(十)을 나란히 배치했다. 로마 숫자로 십은 ‘Ⅹ’인데 이십을 ‘ⅩⅩ’으로 쓰는 것과 똑같다. 가장 보편적 진법(進法)인 십진법에서 ‘十’은 꽉 찬 숫자인데 그 배인 ‘卄’은 곱빼기로 꽉 차있으니 더욱 완전한 숫자다. 그래서 우리는 스무 고개를 넘듯이 20개 질문을 던지면서 범위를 좁히고 초점을 맞추어 문제를 맞혔나 보다. 19 다음의 20인 입(卄)은 두 배로 꽉 차 있는 숫자처럼 들린다. 19금(禁) 제한도 꽉찰 만(滿)19세인 20세가 되면 풀린다. 20세 청춘은 청춘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청춘이다. 청춘 예찬은 20세 젊음에 대한 예..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15> 틴과 칭 ; 13에서 19까지

죽을 사(死)와 발음이 비슷해서, 또는 한자 4(四)가 사람(人)을 가둔(?) 모양이라 불길하다는데? 4는 4번 타자처럼 좋은 경우들이 더 많은 길한 수다. 4에 비해 13이 흉한 수로 여겨지는 이유는 단순치 않다. 13이 불쌍한 불상(不祥)의 수가 된 서너 가지 설들이 있다. 굳이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아도 될 만한 내용들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들 설들에 공통점이 있다. 그냥 13이 아니라 12+1의 13이다. 완전한 순환을 뜻하는 숫자 12에 1이 더해졌다면 12보다 더 좋은 수를 뜻할 수 있다. 그래서 13이 원래 가장 길한 수였는데 소수 엘리트들이 자기네들끼리만 사용하려고 13을 불길한 수로 만들었다는 음모설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미국 성조기에는 13개 줄이 그어져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14> 십이와 열둘 ; 순환의 수

달 모양은 신통하게 바뀐다. 검은 밤하늘에 달이 안보이는 삭(朔 ●)으로부터 초승달→상현(上弦) 반달◐→보름달 망(望 ○)이 될 때까지 15일, 보름이 걸린다. 보름달로부터 하현(下弦) 반달◑→그믐달→삭이 될 때까지 15일이 걸린다. 달의 한 주기는 29~30일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시간표가 달력이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달력은 태양력, 즉 해력인 양력이지만 달력은 말 그대로 한 달 두 달… 달의 력(曆)인 달력이다. 그런데 음력 달력만 쓰면 차질이 생긴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공전하는 한 해는 양력 365일인데 비하여 음력으로 29~30일 주기의 열두 달은 354일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11일의 차이다. 그래서 19년에 일곱 번씩, 대충 3년이나 4년에 한 번씩 어느 연도에 윤월(閏月)을 두..

[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513> 열 더하기 일 ; 11인 졸

학교에서 한 학기나 한 학년을 마칠 때 종(終)업식을 할 수 있다. 회사에서도 한 사업년도를 마치는 마지막 날에 종업식을 한다. 한 강의 과목을 마칠 때는 종강이다. 그런데 하나의 개별 단위가 아니라 정규 과정을 마칠 때는 졸업이라 한다. 영어로는 그레이드(grade)가 올라가는 ‘graduate‘다. 하지만 졸업이라는 낱말은 그래주에이트와 상반되는 뜻을 담고 있다. 졸업하면 올라가기보다 낮아지기에. 도대체 뭐가 어쨌길래? 마칠 종(終)은 단순히 끝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칠 졸(卒)은 그 뜻이 복잡미묘하다. 장기판에서 적과 가장 앞에서 직접 마주치고 있는 卒은 미약한 존재다. 크기부터 가장 작다. 후퇴도 못한다. 전진할 때는 한 칸만 나갈 수 있다. 행동 범위가 좁다. 손쉽게 잡혀 죽는다. 졸은 졸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