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994

[이규태 코너] 非理와 선비

[이규태 코너] 非理와 선비 조선일보 입력 2002.01.29 20:23 권력에는 불법과 비리가 세균처럼 기생하는 데 고금이 다르지 않다. 권력이 집중될수록 기생이 심하게 마련이요, 전통사회에서 이 권력형 비리를 억제해온 것은 지배 엘리트들의 마음의 그릇을 이루고 있던 선비정신이었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역대병요」를 편찬시켰는데, 단종 1년에야 완성되었다. 편찬 책임자인 수양대군이 편찬에 참여한 학자들에게 벼슬 한 등급씩을 올려주는 상을 내렸다. 한데 후에 사육신이 되는 하위지만이 승급 상여를 거부했다. 은혜가 임금으로부터 내린 것이라면 몰라도, 정국이 불안한데 대군이 상을 내린다는 것은 저의가 드러나 보인다는 이유에서 상을 거절하고 낙향해 버렸다. 이처럼 비리가 아닌데도 낌새가 이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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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단명 장관

[이규태 코너] 단명 장관 조선일보 입력 2002.01.30 19:52 갑오개혁 이래 일제의 강제 병탄에 이르는 16년 동안 서울시장이랄 한성판윤(漢城判尹)이 꼭 70명이나 바뀌고 있다. 한 판윤당 80일간씩 근무한 꼴이다. 갑오년 한 해만도 21명의 판윤이 갈렸으니 보름에 한 사람씩 갈린 셈이다. 이민승 같은 이는 판윤으로서 재직이 불과 이틀밖에 안 되었다. 비단 한성판윤뿐 아니라 다른 벼슬들도 한통속이었으니 나라를 위해 벼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벼슬이 있어왔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는 조상들의 맹렬한 벼슬 지향을 말해주는 것이 되며 단 며칠이라도 벼슬에 있고자 하는 이 한국인의 변수가 무엇이었을까. 벼슬을 했다 하면 속된 은어로 「눈꽃이 피었다」고 했다. 벼슬 잔치를 육화무(六花舞)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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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계약 연애

[이규태 코너] 계약 연애 조선일보 입력 2002.01.31 20:30 당나라 위고(韋固)라는 이가 밤중에 길을 가는데 한 노인이 달빛 아래 커다란 보따리를 멘 채 누워 책을 뒤지고 있었다. 그 보따리 속에 뭣이 들어있느냐고 묻자 붉은 끄나풀들이 들어 있다 했다. 뭣에 쓰는 끈이냐고 묻자 남녀가 부부로서 궁합이 맞았을 때 맺어주는 연(緣)끈이라 했다. 이 이야기가 씨알이 되어 중매쟁이를 월하노인(月下老人))이라 했다. 이 연끈을 얻어다가 좋아하는 여인과 발을 묶었으나 조석으로 싸움만 하고 끝내 파경하고 말았다. 이에 월하노인을 찾아가 항의를 했더니 뒤져보던 책을 내보이며 이 책에 적혀있는 맞는 궁합을 찾아 묶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로할 연분이란 숙명적임을 말해주는 고사다. 우리나라에도 궁합을 나막신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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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법율용어 考

[이규태 코너] 법율용어 考 조선일보 입력 2002.02.01 19:38 선조 때 서울 운종가에서 아내의 간통을 적발한 남편이 아내의 국부를 돌로 쳐 죽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다룬 관가에서는 조서를 꾸미는데 국부의 표현을 두고 고민하였다. 성(性)을 천대하는 삼강오륜이 지배하는 사회였기에 성기를 나타낼 법률용어가 없었고, 여염에서 쓰는 상스러운 말을 쓴다는 것은 선비로서 파계(破戒)가 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우회적 법률용어가 탄생하고 있다. 함양 선비 오일섭(吳一燮)이 생각해낸 것으로, 「모나지 않은 돌로(以無方之石) 차마 보지 못할 곳을 때려죽였다(打殺不忍見之處)」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성색(性色)표현을 기피하는 기색(忌色)문화권의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 성기를 나타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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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부즈카시

[이규태 코너] 부즈카시 조선일보 입력 2002.02.02 20:05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근교를 지나면서 이 나라의 국기(國技)라는 피 비린 마상투기(馬上鬪技)를 구경한 일이 있다. 기마민족의 용맹을 기르는 부즈카시라는 이름의 이 경기는, 넓은 황무지 복판에 목 잘린 양 한 마리를 놓아두고 양편으로 가른 기사(騎士)들이 이 양을 뺏고 빼앗겨가며 붉은 깃대를 세워둔 골에 던져놓는 편이 이긴다. 말끼리 부딪쳐 물고 차고 기어오르고 마상의 선수들끼리 채찍질하며 싸우기로, 낙마를 하여 짓밟히고 말에 끌려 달리기도 하는 북방 기마민족의 원시 스포츠랄 것이다. 아프간 사람들이 그토록 즐겼던 이 부즈카시를 탈레반 정권이 금지시켜 내리다가 탈레반 축출과 더불어 등장, 여가를 독점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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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시금치 돼지

[이규태 코너] 시금치 돼지 조선일보 입력 2002.02.03 19:13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에 '혓바닥 요리 '라는 게 있다. 지옥의 마왕이 이 세상 그 잡다한혓 바닥을 이리저리 모아 요리함으로써 특유한 맛을 내어 먹는다는 줄거리다. 모략하는 혓바닥,시샘하는 혓바닥,아부하는 혓바닥,키스하는 혓바닥, 직언하는 혓바닥 등등 혓바닥에 스민 감정이나 정신을 이리저리 조화했으니 희한한 맛들이 아닐수 없었겠다. 진(晋)나라 때 그 부와 사치를 겨루었던 왕개(王愷)가 사람 젖만을 먹여 기른 돼지고기를 먹자 라이벌인석숭(石崇)은 가둬놓고 금가루만 먹여 기른 닭의 달걀을 먹었다.곧 가축에 색다른 음식을 먹여 기름으로써 육질이나 맛을 달리해 먹는 사치는 역사도 유구했다. 미식가로 유명한 서태후(西太后)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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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눈물’ 소동

[이규태 코너] ‘눈물’ 소동 조선일보 입력 2002.02.04 19:55 워낙 눈물이 많았던 나라라선지 흐르는 형태에 따라 다른 말을 썼던 조상들이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체(涕), 갈라져 흐르는 눈물을 사(泗), 콧물과 더불어 흘리는 눈물을 이라 했다. 펑펑 쏟는 눈물이 누(淚)요, 눈물을 눈 가장자리에 고여두고 흘리지 말아야 하는 눈물을 누라 했으니 대단한 눈물 민족이었다. 이 눈물에 색깔까지 넣었다. 김인후(金麟厚)가 유배지에서 눈물을 읊고 있는데 「석양에 붉게 물든 눈물 아까워서 못 떨어뜨리겠네」 했으니 붉은 눈물이요, 감정이 결핍된 눈물을 하얀 눈물이라 했다. 억제가 심했던 옛 어머니들 눈물없이 못 살았다. 음식의 간(鹽度)을 볼 때 기억해두었던 눈물맛의 간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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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精子아빠

[이규태 코너] 精子아빠 조선일보 입력 2002.02.05 19:46 홀아비의 과부약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기를 꼭 가져야만 되는 여인의 총각약탈도 있었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그 사례가 실려있다. 정덕년이라는 사람 집에 시골에서 서생 하나가 과거치러 올라와 머물고 있었는데 야밤에 종가를 지나고 있을 때 일이다. 장사 네댓 명이 이문께에서 불쑥 몰려나오더니 이 서생을 때려엎어 마련해온 커다란 자루에 담아묶는 것이었다. 둘러메고 이 골목 저 골목 누빈 끝에 담 안으로 던져놓더니 자루를 풀고 정중히 방안으로 모시는데 비단 이부자리가 깔린 신방이었다. 조금 있으니 성장한 여인이 들어와 동침을 청하고 파루(罷漏)의 북소리가 나자 여인은 사라지고 장정 네댓이 다시 나타나 자루에 담아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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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사라진 榜

[이규태 코너] 사라진 榜 조선일보 입력 2002.02.06 19:51 한 사람에게는 세 개의 인생이 있다. 가족으로서의 위상을 말해주는 가족적 인생, 사회적인 위상을 말해주는 사회적 인생, 그리고 재력으로서의 위상을 말해주는 경제적 인생이 그것이다. 세 인생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만 가장 핵심인 사회적 인생의 갈림길이 방(榜)이었다. 출세의 첫 관문인 과거의 급락(及落)을 알려주는 인생 교차로의 첫 신호등이기에 그 방 아래에서 희비를 절감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줄안다. 1000여년간 그 희비를 관장해온 방이 사라져가고 있다 한다. 휴대전화 문자서비스나 인터넷을 통해 알리고 학교문 앞에는 관습적으로 방을 내붙였을 뿐 통지기능이 증발하고 없고 아예 방을 붙이지 않은 대학도 늘어가고 있다 한다. 영상 통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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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햇빛 살인

조선일보 | 오피니언 [이규태 코너] 햇빛 살인 입력 2002.02.07 19:41:58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알제리의 해안을 산책하고 있었다. 강렬한 햇빛에 타는 듯한 모래 위는 모든 것이 정지하고 있는 듯했다.저편에서 아라비아 사람 하나가 걸어오자 뫼르소는 막연한 권태를 이길 수 없어 권총을 발사했다. 쓰러져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다시 4발을 쏘았다. 그에게는 그 사람을 죽일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동기를 추구하면 햇빛이 자기로 하여금 살인케 했다고 일관했다. 부조리를 부각시킨 것이지만 인간의 무의식층에는 햇빛 거부의 원초 심리가 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북쪽으로 갈수록 햇빛을 지향하고 남쪽으로 갈수록 햇빛을 거부하는 문화가 발달한다. 남쪽인 고대 이집트에서 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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