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994

[이규태 코너] 돈스코이號

[이규태 코너] 돈스코이號 조선일보 입력 2003.06.05 19:29 건도(建都) 300돌 잔치가 막바지에 오르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그 도시 복판을 흐르는 네바강변에 관광용 군함 한 척을 정박시켜 놓았다. 볼셰비키 혁명의 횃불을 올린 기념현장으로 성역화하고 있지만 혁명 이전에는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함대에 대패한 증거로 국민의 의분과 결속을 도출하려 도망쳐나온 순양함 오로라호다. 1904년 동해 울릉도 인근 바다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에 벌어진 대해전에 참전했던 8척의 순양함 가운데 4척이 침몰하고 필리핀으로 도망친 3척의 순양함 가운데 하나가 오로라호며, 나머지 한 척이 선원들을 보트를 타게 하거나 헤엄쳐 울릉도에 상륙할 수 있게끔 근해까지 와서 해저판을 뜯어 스스로 침몰시킨 돈스코이호다. 돈스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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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종묘의 성기(性器) 설치전(展)

[이규태 코너] 종묘의 성기(性器) 설치전(展) 조선일보 입력 2003.06.06 19:32 법도 있는 집안에서 제사 떡을 빚을 때 부녀자들은 창호지로 입을 막고 작업하는 것이 관례였다. 여자의 입에서 뿜어지는 색기(色氣)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채에 바깥어른이 있으면 안채에 있는 부녀자들은 소리내어 말해서는 안 되기에 함구언(緘口言)이라는 귓속말로 소곤거려야 했다. 여자의 색을 기피하는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여색을 멀리하고 피하는 기색(忌色)은 한국 전통 지배층의 존재이유요 의무였다. 하물며 성기나 성행위임에랴. 선비들 길 가다가 암탉이 수탉 업는 것을 보거나 메뚜기 업고 뛰는 것만 보아도 발길을 돌려 집에 돌아와 눈을 씻는 세안(洗眼)을 했다. 길 가다가 방아찧는 소리만 들어도 돌아와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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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중국의 김치선풍

[이규태 코너] 중국의 김치선풍 조선일보 입력 2003.06.16 19:27 | 수정 2003.06.16 22:51 중국에 김치 특수가 일어나고 있다. 사스가 사그라지면서 한국김치 수요가 기하급수로 늘어나 베이징 등 주요 도시에서 김치가 동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사람 앞에 사스가 맥을 못춘 이유로 한국사람이 상식하는 김치 때문으로 귀결시킨 것일 게다. 김치가 사스 예방에 힘을 발휘했다면 다행이요, 그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괄목할 만한 문화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산길을 티베트 로드라 한다. 그 길목 타카리족의 한 찻집에 들렀더니 소금에 절인 배추를 내놓으면서 「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전라도 전역에서 김치를 「지」라 한 것에 문화적 연결을 직감할 수 있었다. 김치의 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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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우주작물 제1호

[이규태 코너] 우주작물 제1호 조선일보 입력 2003.06.17 19:52 한동안 유행했던 '칠갑산'이라는 대중가요가 있었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라는 대목을 듣던 노모가 하던 혼잣말이 생각난다. '그 아낙네 무척 부지런하구만ㅡ' 하는. 왜 콩밭 매면 부지런하냐고 물었더니 콩밭은 풀 속에서도 잘 자라기에 매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며 논둑 콩이 풀더미 속에서도 잘 자란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풀을 매주면 콩이 더 잘 자라기는 하지만, 그보다 밭에 풀이 있으면 아낙이 게으르다고 소문날까봐 콩밭을 매긴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라마다 그 풍토에 알맞은 작물이 있어 그 작물로 농사를 지으면 잡초도 잘 자라지 않고 품도 적게 들어 수월하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풍토에 가장 적합한 작물이 뭣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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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조흥은행

[이규태 코너] 조흥은행 조선일보 입력 2003.06.20 19:15 조흥은행 전신인 우리나라 최초의 한성은행은 20칸짜리 기와집으로 지금 안국동 옛 안국병원 자리에 있었다. 마루방을 가운데 낀 방 두 개의 기역자 집으로 안방에는 은행장인 임금님의 사촌 이재완(李載完)과 대신을 역임한 김종한(金宗漢)이 부장(副長)으로서 차지하고, 곁방은 좌총무와 우총무, 그리고 행원 하나가 출납 예금 대출 전당 환 그리고 서무를 분담해 보고 있었다. 고객이 담보물로 당나귀 한 마리 몰고 오면 총무들이 화롯불 하나 복판에 놓인 마루방에 부추겨 모시고 담뱃대에 불을 붙여 드리는 서비스를 했다. 이 초기 은행에서도 이중장부를 썼는데 요즈음처럼 탈세를 위해서가 아니다. 일본계 제일은행에서 싼 이자로 빌려와 비싼 이자로 빌려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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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金蘭契

[이규태 코너] 金蘭契 조선일보 입력 2003.06.22 18:57 동해안 금강산에서 해안을 따라 경주 토함산까지 내려오노라면 금란현(金蘭縣) 금란굴(金蘭窟) 금란리(金蘭里) 후금란(後金蘭) 금란치(金蘭峙) 금란산(金蘭山) 등 금란이라는 지명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옛 문헌에 신라 화랑들의 원유지(遠遊地)를 금란이라고 했음을 미루어 신라나 그 이전 젊은이들의 집회소와 연관이 있는 곳들일 확률이 높다. 금란은 역경(易經)에 나오는 말로, 한 마음 갖기로 한 다짐의 굳기가 금보다 강하고 아름답기가 난보다 향기롭다는 결의(結意)의 미사(美辭)다. 지금은 약속을 법률로 얽어매지만 옛날에는 약속사항들을 돌에 새겨 산봉우리에 묻거나 바위나 산 위에 올라 하늘에 서약하는 서천(誓天)의 의식을 베풀어 보증했다.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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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황새 탄생

[이규태 코너] 황새 탄생 조선일보 입력 2003.06.25 19:33 4년 전 일본에서 멸종돼 가고 있는 따오기 새끼 한 마리 인공 부화시킨 것을 두고 온 일본열도가 달아올랐던 일이 생각난다. 신문과 텔레비전이 매일 매 시간 머리기사로 다루고 알 속에서 알껍데기 쪼는 소리부터 깨어나기까지 전 과정과 먹이의 메뉴까지 상세히 보도했었다. 일왕(日王)이 이례적으로 나라의 경사라고 성명을 냈고, 정부에서는 이 따오기 이름을 온 국민으로부터 공모까지 하여 너무 호들갑스럽다는 국제여론마저 없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세계적으로 600마리밖에 없다는, 따오기 못지않은 멸종 희귀조 황새를 인공이 아닌 자연 부화시켰는데도 아는 사람이 별반 없다. 사라져가는 자연에 대한 관심도가 비교가 되고 새만금사업이 자연파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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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낮잠

[이규태 코너] 낮잠 조선일보 입력 2003.06.26 19:25 | 수정 2003.06.26 22:11 공자의 10대 제자 가운데 재여(宰予)는 스승에게 사사건건 대든 문제의 제자였다. 공자가 3년 친상(親喪)을 내세우자 격식에 얽매여 공경하는 진심을 도리어 해친다 하여 1년상을 주장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재여가 점심 먹고 낮잠 자러 침실에 드는 것을 보자 공자는 말했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진이 빠진 흙으로는 벽을 칠 수 없다'고 촌각을 아껴야 할 학자로서 낮잠 자는 것을 두고 장래를 점친 것이었다. 후에 제(齊)나라 대부로 출세하자 재여의 낮잠은 썩으려 하는 나무에 생기를 주고 푸석한 흙에 진기를 주는 행위였다 하여 격식보다 실사(實事)에 비중을 둘 때 곧잘 인용하는 낮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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