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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두 花色 진달래

[이규태코너] 두 花色 진달래 조선일보 입력 2004.04.20 17:37 봄날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진달래는 그 꽃 빛깔의 농담(濃淡)에 따라 호칭이 달랐다. 하얀 진달래는 흰달래, 연한 분홍이면 연달래, 알맞게 붉으면 진달래, 너무 진하여 자줏빛이 나면 난초 빛 같다 하여 난달래라 했다. 이 진달래 빛깔을 아가씨의 유방 빛깔에 비유하여 철부지 소녀를 흰달래, 부끄럼 타는 사춘기를 연달래, 한창 피어나는 아가씨를 진달래, 한창때를 넘긴 노처녀를 난달래라 했으니 사투리치고는 감각적이다. 어릴 적 산나물 캐는 아가씨를 만나면 “연달래 진달래 나-안-달-래!” 하고 놀리면 이 아가씨 바구니 던져 놓고 동동걸음 치던 생각이 난다. 유방을 연상, 노처녀에 비긴 것이 억울해서였을 것이다. 옛 선비들은 꽃의 외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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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베이징 오리구이

[이규태코너] 베이징 오리구이 조선일보 입력 2004.04.21 18:10 국가(國歌) 국화(國花) 국기(國旗)가 있듯이 그 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어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국찬(國餐)이라는 게 있다. 베이징에 가서 만리장성 가보지 않으면 가나 마나라는데, 가서 먹지 않으면 또 가나 마나라는 국찬이 페킹 덕(Peking duck), 곧 베이징 오리구이다. 중국을 방문 중인 김정일 위원장이 100여년 된 오리구이의 본포(本鋪) 취안쥐더(全聚德)에 가서 오리구이를 먹었다던데 이 집은 서태후(西太后)를 비롯, 중국 황제와 수뇌들 그리고 닉슨을 비롯한 200여개국 정상 등의 국빈이 들렀다는 곳이다. 오리구이는 2100여년 전 한(漢)대 고분인 마왕퇴(馬王堆)에서 나온 죽간(竹簡)에 ‘오리구이 한 바구니’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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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중국 동북미(東北米)

[이규태코너] 중국 동북미(東北米) 조선일보 입력 2004.04.22 18:19 중국이 한국의 쌀 개방 재협상에 참가할 뜻을 통보함으로써 WTO협정에 따른 쌀 개방에 중국쌀의 유입이 불가피할 것 같다. 이 세상 사람들이 밀 다음으로 많이 먹는 곡식이 쌀이요, 쌀밥도 물기를 없앤 제습반(除濕飯) 문화권과 습기를 흡수시킨 흡습반(吸濕飯) 문화권으로 대별되는데, 전자가 대세를 차지하고 후자에 속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그래서 내년에 개방되는 이러한 쌀수출을 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나 중국의 쌀 주산지인 동북 싼성(東北三省)에서 한국사람의 입맛에 맞는 흡습반미를 대량으로 경작해왔다. 중국 동북미가 질이나 맛이 국산쌀에 뒤지지 않는 데다 30%나 싸다 하니 유사 이래의 농업대란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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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돌아온 고래

[이규태코너] 돌아온 고래 조선일보 입력 2004.04.23 18:09 길이 7m의 고래가 울산 앞바다의 그물에 걸려 1억원대에 팔렸다는 보도가 있었고 70여년 전에 한국해역에서 자취를 감춘 향고래 일가족이 모습을 나타내는 등 고래가 돌아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토종고래는 초식하는 민족을 닮아 풀 고래가 주종으로 머리는 영리하지만 대체로 체구가 작은 게 특징이다. 울산 반구대의 석기시대 암각화(巖刻畵)에 고래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한국의 고래 역사는 유구하다. 기록상으로는 고구려 알천왕(閼川王·AD 47) 때 동해안에 사는 고주리라는 분이 밤에도 빛을 내는 고래 눈깔을 바쳤다는 것이 최초로 고대에는 조명용으로 고래를 잡았다. 고려시대에는 기름의 수요 때문에 고래들이 수난받았다. 원나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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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서울의 중국말 표기

[이규태 코너] 서울의 중국말 표기 조선일보 입력 2004.04.25 19:40 | 수정 2004.04.25 19:41 서울의 공식 비공식 지명만도 수십 개에 이른다. 백제 때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고구려 때는 남평양(南平壤), 신라 때는 한산주(漢山州), 신주(新州) 남천(南川) 한양(漢陽), 고려 때는 양주(楊州) 남경(南京) 한양(漢陽), 조선조에는 한양 다음에 한성(漢城),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京城)으로 불렸다가 광복 후 처음으로 주체화해 서울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식 지명 말고 별칭도 많았다. 수선(首善) 목멱양(木覓壤) 경도(京都) 경사(京師) 경락(京洛) 도하(都下) 장안(長安) 황성(皇城) 경조(京兆) 문안(門內) 등 호칭이 많았다. 중국에서는 광복 후 주체화한 호칭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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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용천(龍川)

[이규태 코너] 용천(龍川) 조선일보 입력 2004.04.26 18:03 압록강의 강구(江口)를 용만(龍灣)이라 한 데서 그 북쪽 기슭인 의주의 옛 지명이 용만이요, 그 남쪽 기슭인 용천도 용만이었다. 용만의 섬들이 용천의 산형(山形)과 이어진 것이 용이 굽이친 것처럼 보았던 데서 용만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선지 용천을 둘러싼 산도 용골산(龍骨山)이요, 그 용머리가 용안산(龍眼山)이며 감싸고 있는 샘이 용천(龍泉)으로, 이곳에 관가들이 모여 있다. 이 풍수용이 승천할 때 낸 발톱 자국이 나 있다는 용암(龍岩)이 있다. 풍수용이 지배하는 고을이라서인지 그 성쇠도 용과 무관하지 않다. 국경지대라 역사적으로 거란·여진·몽골·청나라의 침입에 맨 처음 짓밟힌 땅이요, 개화기에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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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젓가락질 대회

[이규태코너] 젓가락질 대회 조선일보 입력 2004.04.27 18:44 나무마다 결(木理)이 다르다. 각기 다른 결의 나무판자 아홉개를 손바닥으로 기억시키고 눈을 감긴 후 알아맞히게 하는 촉각(觸覺) 민감도를 나라별로 비교하는 실험이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있었다. 중동계 사람들은 1~2개꼴, 미국과 유럽계 사람들은 3개꼴인데 한국사람은 7개를 맞히고 있다. 한국전쟁 중에 한·미 조종사의 순발력 비교를 한 적이 있었는데, 발동에서 발진까지의 시간을 잰 것으로 한국조종사군이 평균 3.6초가 빨랐다 한다. 이상의 사례들은 한국사람이 보고(視覺) 듣고(聽覺) 맡고(嗅覺) 맛보고(味覺) 만져보고(觸覺) 하는 감각끼리의 연락기능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기능이 남달리 발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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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이라크의 새 국기

[이규태 코너] 이라크의 새 국기 조선일보 입력 2004.04.28 18:50 | 수정 2004.04.28 18:50 국기는 한 나라에 각기 다른 하나씩이지만 빛이나 문양 디자인이 유사한 네댓 그룹으로 대별된다. 예전에 복속(服屬) 관계에 있던 나라끼리 한 그룹을 이루고 있는데 영국을 위시한 십자기 그룹이 그것이다. 중세 십자군 전쟁 때 출정하는 동맹국들에서는 수도원의 문간에 세워둔 십자기를 들고 참전했던 데서 그것이 국기로 정착한 것이며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많고 넓은 나라들은 지금도 십자를 국기 속에 간직하고 있다. 국기가 없었던 한말 한·미수호조약을 맺으면서 국기가 급히 필요해졌다. 이 조약을 도와준다 하고 와 있던 중국특사 미건충은 조선국기 문양을 자기네 국기문양인 용으로 하되 발톱 수를 중국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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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막사발 예찬

[이규태코너] 막사발 예찬 조선일보 입력 2004.04.29 18:20 이스탄불 토프카피궁(宮) 동양 도자기 컬렉션에서 루비며 에메랄드 등 보석을 눈부시게 박은 백자를 볼 수 있다. 원형미의 파괴로 꼴불견이요, 실용성도 없어 그릇으로도 죽여 놓은 미의 시체를 보는 것 같았다. 서양사람은 시각(視覺)과 청각(聽覺)으로 미를 포족하고 동양사람은 촉각(觸覺)으로 미를 포족한다. 도자기만 해도 그렇다. 페르시아 시장에 가보면 오색 찬란한 도자기 노적 틈을 10분 남짓만 걸어도 현기증이 나는데 부딪쳐 소리를 들어보고 사기에 그 쇳소리가 현기증을 가중 가속시킨다. 이렇게 눈으로 보고 소리로 산다. 하지만 한국 백자의 서민적 표출인 막사발은 백자라 해서 희지도 부시지도 않다. 회백(灰白)으로 화려하고 번적이고 눈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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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코너] 투신 심리학

[이규태 코너] 투신 심리학 조선일보 입력 2004.04.30 19:27 초(楚)나라 명신으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던 굴원(屈原)이 주변의 모략으로 강남에 좌천되자 장사(長沙) 인근 멱라수에 투신 자살했다. 그 억울함의 농도와 공감을 만방에 일으키는 데 최선의 수단으로 투신을 선택한 것이다. 문화권에 따라 선호되는 자살수단이 있는데 몸에 상처를 내는 자신(刺身)이 역사적 상식이던 중국에서 투신은 흔치않은 선택이었다. 곧 투신에는 그렇게 할 심리적 변수가 내재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에게는 죽이고 싶은 원망과 죽임당하고 싶은 원망이 공존하고 있어 이를 앰비버런스라 한다. 누군가에 배신당하거나,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거나, 그러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보면 죽이고 싶은 원망이 생기고, 그 원망을 성취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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