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304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03> 道者誠人之姓

길 도(辵- 9)것 자(老 - 5)참으로 성(言 - 7)사람 인(人 - 0)갈 지(丿- 3)타고날 성(女 - 5) '관자' '君臣 上(군신 상)'에 나온다. "道者, 誠人之姓也, 非在人也. 而聖王明君, 善知而道之者也. 是故治民有常道, 而生財有常法. 道也者, 萬物之要也. 爲人君者, 執要而待之, 則下雖有姦僞之心, 不敢殺也."(도자, 성인지성야, 비재인야. 이성왕명군, 선지이도지자야. 시고치민유상도, 이생재유상법. 도야자, 만물지요야. 위인군자, 집요이대지, 즉하수유간위지심, 불감살야) "도란 참으로 사람의 본성이니, 그릇되는 것은 사람 탓이다. 거룩한 왕과 현명한 군주는 이를 잘 알아서 도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이런 까닭에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한결같은 도가 있고, 재물을 생산하는 데에는 한결같은 법칙이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02> 明德과 峻德

밝힐 명(日-4)덕 덕(彳-12)높을 준(山-7) 이제부터는 5장이다. 짤막하므로 전부를 제시한다. 5-1은 이렇다. "康誥曰: '克明德.'"(강고왈: '극명덕') "'강고'에서 말했다. '덕을 잘 밝혀라.'" 5-2는 이렇다. "太甲曰: '顧諟天之明命.'"(태갑왈: '고시천지명덕.') "'태갑'에서 말했다.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라.'" 5-3은 이렇다. "帝典曰: '克明峻德.'"(제전왈: '극명준덕.') "'제전' 에서 말했다. '크나큰 덕을 잘 밝혀라.'" 5-4는 이렇다. "皆自明也."(개자명야) "이 모두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강고는 '尙書(상서)'의 편명이다. 克(극)은 잘하다는 뜻이다. 태갑도 '상서'의 편명이다. 顧(고)는 돌아보다, 마음에 새기다는 뜻이다. 諟(시)는 是(시)와..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01> 女懷淸臺

여자 녀(女-0)품을 회(心-16)맑을 청(水-8)돈대 대(至-8) '사기'의 열전 마지막은 '貨殖列傳(화식열전)'이다. 농업을 비롯한 경제 활동을 통해 거대한 재부를 쌓은 인물들에 대한 전기다. 춘추전국시대에 경제적으로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시대적 특성을 알고 설정한 것이다. "巴蜀(파촉)에 사는 과부 淸(청)의 집안은 조상 때부터 丹沙(단사, 수은)가 나는 동굴을 발견하여 몇 대에 걸쳐 그 이익을 독점해왔으므로 재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청은 과부이기는 했지만 가업을 잘 지켰고, 재물을 잘 써서 자신을 지키며 도적으로부터 침범을 당하지 않았다. 시황제는 청을 정숙한 부인으로 여겨 도성으로 불러서 손님으로 대접하고 그녀..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00> 水則載舟, 水則覆舟

물 수(水-0)곧 즉(刂-7)실을 재(車-6)배 주(舟-0)엎을 복(-12) '순자' '王制(왕제)'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君者, 舟也; 庶人者, 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군자, 주야; 서인자, 수야. 수즉재주, 수즉복주.)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싣기도 하지만, 물은 배를 뒤엎기도 한다"는 뜻이다. '관자' '牧民(목민)'에 나온다. "무릇 영지를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네 계절의 순환을 살펴서 곡식 창고가 넉넉해지도록 해야 한다. 나라에 재물이 많으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오고, 땅이 개간되어 넓어지면 백성이 머물러 살며, 곡식 창고가 가득 차면 예절을 알게 되고, 의복과 식량이 넉넉해지면 영예와 치욕을 알게 되며, 위에서 법도를 잘 지키면 六親(육친)의 사이가 도타와..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99> 子欲善而民善矣

그대 자(子 - 0) 하고자 할 욕(欠 - 7) 착할 선(口 - 9) 어조사 이(而 - 0) 백성 민(氏 - 1) 어조사 의(矢-2) 현자는 현자를 알아보고 군자는 군자를 가까이한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어떠한가? '논어' '泰伯(태백)'을 보면, 공자가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민가사유지, 불가사지지)"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백성들에게 그 길을 따라가게 할 수는 있으나 알게 할 수는 없도다"라는 뜻이다. 이는 백성을 무시해서 한 말이 아니다. 백성의 처지가 실제 그러했기 때문이다. 알게 하려면 가르쳐서 배우도록 해야 하는데, 당시 백성들은 생산에 종사하면서 갖가지 조세와 부역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배울 여력도 여유도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웠던 이들이다. 공자가 "따라가게 할 수 있..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98> 不偏不黨

- 아닐 불(一-3)치우칠 편(人-9)기울어질 당(黑-8) 안영은 죄인의 몸이 된 월석보를 보자마자 기꺼이 贖錢(속전)을 내고 풀려나게 했으며,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또 대부분의 남자가 허투루 듣고 넘어가거나 때로 듣고서 기분 나쁘게 여기는 아내의 말을 깊이 새겨듣고 행동거지를 바꾼 마부의 마음 씀씀이를 높이 평가하여 대부로 삼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 모두 그 자신이 군자이거나 현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자신이 소인배였다면, 결코 죄인의 몸으로 있는 사람에게서 현자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고, 하찮은 마부를 대부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안영은 마부를 대부로 삼았을까? 마부는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내였다. 남의 말을 들을 줄 안다는 것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잘..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97> 晏嬰과 馬夫

- 성 안(日-6)갓난아이 영(女-14)말 마(馬-0)사내 부(大-1)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하면서 '列傳(열전)'이라는 항목을 두어 신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남다른 삶을 산 인물들의 행적을 매우 생동감 넘치게 서술하였다. 전체 130권 가운데서 열전이 70권으로 절반이 넘으니, 그 비중을 알만하다. 이 열전에서 첫 번째가 伯夷(백이)와 叔齊(숙제)를 다룬 '伯夷列傳(백이열전)'이고, 두 번째가 관중과 안영을 다룬 '管晏列傳(관안열전)'이다. 거기에 안영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둘 나온다. 越石父(월석보)는 현명한 사람인데, 어쩌다가 죄인의 몸이 되었다. 안영이 밖에 나갔다가 길에서 그를 보고는 마차의 왼쪽 말을 풀어서 贖錢(속전)으로 바치고 월석보를 마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다. 안영은 아무런 인사도..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96> 患不知人

- 걱정할 환(心-7)아닐 불(一-3)알아볼 지(矢-3)남 인(人-0) 현명한 신하를 한 명이라도 기용하여 그를 전적으로 믿고 쓴다면, 그 신하가 다시 군자를 알아보고 군자를 천거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군자들로 이루어진 신하들이 정치를 도맡아 하게 되어 천하가 안정되고 백성은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된다. 태평한 시절은 이렇게 현자를 알아보고 군자를 가까이할 줄 아는 신하들이 있을 때 도래한다. 제나라 환공이 패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포숙과 관중, 습붕 등 현명한 신하를 믿고 썼기 때문이고, 그가 굶어서 비참하게 죽은 것은 역아, 개방, 수조 따위 소인을 믿고 곁에 두었기 때문이다. 관중이 환공에게 기용될 수 있었던 데에는 환공을 모시던 鮑叔(포숙)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관중..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95> 前王不忘

- 앞설 전(刀-7)임금 왕(玉-0)아닐 불(一-3)잊을 망(心-3) 권력을 휘두르거나 권위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감싸는 일을 그저 무르고 나약한 자나 하는 짓으로 여기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누가 마음으로 그를 따르겠는가? 설령 따르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形勢(형세)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받들고 따르는 척할 뿐이다. 말 그대로 힘에 屈服(굴복)한 것이지 마음 깊이 따르는 心服(심복)은 아니다. 따라서 그에게 권력이나 권위가 없다면,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등을 돌린다. 하물며 잊지 않고 그리워하겠는가? 이번 회에 소개하는 4-2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詩云: '於戲, 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시운: '오희, 전왈불망!'..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94> 孟子節文

- 성 맹(子-5)임 자(子-0)마디 절(竹-9)글 문(文-0) 주원장의 열등감은 의심증을 낳고 잔인함을 불렀다. 신하들이 옥좌를 넘볼까 걱정하여 잔인하게 공신들도 대거 죽였다. 승상 胡惟庸(호유용)의 세력이 커지자 그가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관련된 사람들까지 무려 3만여 명을 죽였다. 또 몽골에 원정하여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藍玉(남옥)을 모반 혐의로 몰아서 그와 관련된 사람들 모두 1만 5000여 명을 죽였다. 이런 식으로 주원장은 공신들을 죽여 없앴으니, 이는 정권 유지와는 상관없이 열등감에서 비롯된 잔혹한 짓이다. 이런 주원장의 잔혹함을 보다 못한 태자 朱標(주표)가 "폐하, 천하가 살육으로 넘치니 화가 미칠까 걱정입니다"라고 간언하자,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던 주원장은 다음 날 아들..